노자의 도道와 부처의 무아無我와 예수의 사랑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노자가 저술한 도덕경의 첫 구절이다. 풀이하면 ‘도를 도라 말하면 상도가 아니다’라는 의미. 이때의 도(道)는 가장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우리가 발 딛고 서있는 이 땅과 그 위의 수많은 생명들, 하늘과 태양과 달과 별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아우를 수 있고, 이 모든 것이 계속해서 존재하게 하는 힘, 원리, 본질과 같은 것처럼 말이다. 상도(常道)의 상(常)은 항상성을 의미하는데, 노자에게 멈춰있는 것, 완료/완성된 것은 도(道)가 아니다. 도(道)는 끊임없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이라 말한다. 공자 또한 이러한 이치를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으로 표현했다.
도를 도라 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왜 노자는 그것을 말하는 순간 본래의 순수한 항상성을 잃어버리게 된다고 생각했을까. 어렵다. 지금은 우선 말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하자. 말을 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는 주로 내가 아닌, 그래서 내 마음과 생각을 알지 못하는 [너]에게 그것을 전달하기 위해 말을 한다. 말(speech, 파롤)하며 소통하기 위해서는 언어(language, 랑그)라는 추상/관념적인 약속과 체계가 필요하다. [나무에 열린 사과]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 우선 나무를 나무라 하고, 사과를 사과라 하자는 서로 간의 약속이 필요하듯이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습득한 언어체계는 사실 매우 주관적이다. 각자가 나무를 생각하며 떠올리는 이미지와 사과에 대해 떠올리는 이미지 모두 조금씩 다르니 말이다. 그래서 완전하지 않은 언어체계로 인해 오히려 갈등과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사실 초코파이 광고의 노랫말처럼,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것은 그 자체로 대단히 초월적인 상태이다. 말과 언어의 중계 체제 없이 눈빛만 보고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나는 나, 너는 너’로 대립하며 분리된 것이 아닌 어떤 형태로든 하나로 이미 연계되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도 무아(無我)라는 개념을 통해 고정 불변한 실체적 자아로서 [나]라는 것이 사실 허상임을 이야기한다. [나]라는 견고한 경계가 허물어지고, 나를 너로, 우리로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까?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며 구체적 실체로서의 [나]가 존재함을 끝끝내 규정했다. 그러나 타자의 철학으로 유명한 에마뉘엘 레비나스(1906~1995)는 서양철학의 존재론을 ‘전쟁의 철학’으로 규정한다. 유대인이었던 레비나스의 가족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의해 모두 수용소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고, 프랑스군으로 참전한 레비나스 또한 포로로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레비나스는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근대적 이성이 최고조로 발달한 20세기에 어째서 나치라는 비이성적 전체주의가 등장할 수 있었을까. 레비나스는 [나]라는 ‘존재성의 구원’을 위한 극단적 탐구가 오히려 타자를 배척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판단했다.
우리는 머리 끝부터 몸통과 다리를 지나 발 끝까지, 이쪽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팔과 어깨와 가슴을 지나 저쪽 어깨와 팔 손가락 까지를 보통 [나]로 인식하며 살아간다. [나]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그러한 과정에서 많은 경우 [너]를 밟고 일어서야 한다. 이러한 사회는 매 순간이 사실 전쟁과 다를 바 없는, 수많은 [나]들과 대립하고 있는 닫힌 세계라 할 수 있다. 만약 이러한 닫힘과 경계가 무아(無我) 사상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절대적이지 않다면 이 세계는 어떻게 달라질 수 있을까? [나]라는 인식의 경계가 심지어 더 넓게 확장될 수 있다면, 아마 [나]와 [너]를 견고한 성벽 속에 갇혀 분리된 존재가 아닌, [나와 너]처럼 같은 장(場) 안에서 연결된 존재로 인식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나와 너]로서 인식하게 되면 이 땅의 수많은 분쟁들이 단번에 종식될 수 있을까? 나아가 지구자연도 타자가 아닌 [우리]로 인식할 수 있다면,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도로 한가운데 심긴 나무들, 두터운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여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땅 밑의 생명들의 마음까지도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도(道)를 도라 말하지 않아도, 뭐라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분명히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상도(常道).
사실 우리는 이미 눈빛만으로 서로 동시에 이해하는 관계를 수없이 경험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이해하는 인간의 사랑, 사람의 언어를 알지 못하지만 소통할 수 있는 반려동물과의 사랑처럼 말이다. 문득, 예수님과 당시 유대민족 종교지도자와의 대화가 생각난다. 선생님, 율법에서 가장 위대한 계명(도道)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우리는 오직 사랑을 통해 [나]를 넘어 [너]에게로, 그리고 [나와 너]로서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무아(無我)의 인식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언어의 관념체계를 넘어 진정 소통하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道)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