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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피터 Sep 20. 2022

화이위조化而爲鳥 - 물고기가 변하여 새가 되었다.

장자 공부

 장자는 북쪽 깊은 바다에 살았다는 거대한 물고기 곤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 크기가 어찌나 큰지 등의 길이가 몇 천리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집니다. 천 리는 대략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이 물고기가 어느 날 새로 변화했는데, 역시나 그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습니다. 새가 된 곤은 바다가 크게 출렁이며 움직이기 시작하면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오른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섯 달 동안 구만리를 날아 천지(하늘못)라 불리는 남쪽 깊은 바다로 날아간다고 하죠. 이러한 생물이 실존했다면 아마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이 세계에 엄청난 혼란과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을까요?


 등 길이가 몇 천리나 되는 새가 있다고 상상해봅시다. 일반적으로 멀리 나는 새는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보다 두 날개를 펼쳤을 때의 길이가 몇 배는 크기 마련이죠. 거대한 곤이 날개를 활짝 편다면 우리가 보는 하늘을 전부 가려 땅이 어두워질 정도일 것이 분명합니다. 아무튼 이 정도로 거대한 새가 하늘로 솟아오르기 위해 준비운동을 합니다. 두 발로 땅을 우두득 움켜잡고 들썩들썩하며 한 번 두 번 날갯짓을 하는 순간, 그곳이 혹시 태백산맥의 어디쯤이라면 대한민국은 산산조각이나 부서져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 분명합니다. 장자가 소개한 이 신화적 생물은 어쩌면 거대한 파괴와 혼란을 일으킬 정도의 큰 소란을 상징하고 있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힌두교 파괴의 신 '시바'가 담당하고 있는 역할처럼 말이죠.


변화와 새로운 창조는 큰 소란과 파괴로부터


 인도에서 시바는 파괴의 신이며 동시에 춤의 제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시바는 때가 되어 이 세계가 파괴되어야만 할 때 '탄타브'라 불리는 춤을 추는데, 덩실덩실 춤을 추며 그는 오래된 옛-세계를 파괴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혼돈과 파괴의 현장에서 다시 새로운 땅과 하늘의 창조가 시작된다는 것이죠. 곤이 남쪽으로 날아간다는 이야기 또한 시바의 춤처럼 이 세계가 송두리째 바뀔 정도의 거대한 변혁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바다가 크게 출렁이며 움직일 정도의 큰 바람, 곤이 탈 수 있을 정도의 거대한 태풍이 일어나야만 시작된다는 어떤 '때'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고인 물이 깊지 않으면 큰 배를 띄울 수 없듯이 거대한 새 곤도 보통의 바람으로는 그 큰 몸을 조금도 띄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 새는 평범한 일상에서는 사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았을까요? 그저 조용히 자신만의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묵묵하게 에너지를 모을 뿐. 이렇게 덩치만 크고 전혀 쓸 때 없어 보이는 곤을 본 주변의 매미와 새끼 비둘기는 깔깔 비웃으며 말했습니다.


'우리는 힘껏 날아봤자 고작 이 나무에서 저 나무에 이를 뿐이고, 때론 거기에 이르지도 못하고 바닥에 떨어지고 마는데... 구만 리를 날아 남쪽으로 간다고?'  


 그들의 작은 세계관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곤의 큰 삶. 장자는 조금 아는 것으로는 많이 아는 것을 절대 헤아릴 수 없고, 짧은 삶도 긴 삶을 헤아릴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루살이나 매미가 거북이나 나무의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듯이 말이죠.


무용지용無用之用 - 쓸모없음의 쓸모


 장자가 활동하던 춘추전국시대는 거대한 힘을 갖고 있었던 주나라의 권력이 약해지면서 시작됐습니다. 전국 각지의 제후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고, 그러한 대-혼란 속에서 수많은 사상가들 또한 자신의 이상과 뜻을 펼치기 위해 곳곳의 권력과 연결되었죠. 그런데 장자는 여러 권력자의 구애에도 응하지 않고 평생을 소박하고 가난하게 산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왜 세상일에 적극 개입하지 않고 몇 발자국 떨어져 초연하게 그저 세상을 관조했을까요? 아직 자신의 때가 아니라 판단을 했던 걸까요? 어쩌면 장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혀 쓸모없는 존재라 여겨지고,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당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대한 새 곤처럼 말이죠.


 장자를 읽다 보면 무용지용, 쓸모없음의 쓸모라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쓸모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장자의 시대에도 그랬겠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어떤 쓸모 있는 삶, 쓸모 있는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기준이 존재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다 여기며 암묵적으로 합의한 쓸모 있음의 기준이 말이죠. 그렇지만 그것이 과연 절대적일 수 있을까? 쓸모 있음과 없음을 나누는 기준이 고정된 것이 아닌, 사실 시대와 문화에 따라 관점에 따라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장자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곤의 쓸모는 곤만이 아는 것. 우리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주위에서 우리의 삶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많은 말들을 하지만, 사실 우리의 쓸모는 우리만이 제대로 알 수 있을 거예요.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아무런 성과도 결실도 없어 우울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면, 큰 바람을 기다리는 거대한 새 곤을 떠올려 보세요. 어쩌면 우리의 호시절好時節은 아직 오지 않은 걸지도 몰라요. 각종 식물들도 저마다의 결실의 때가 있듯이, 인간들의 삶 또한 각자 각자만의 '때'가 있습니다. 겨울동안 어두운 땅속에서 기氣를 모으며 때를 기다리는 씨앗처럼. 그때가 오면, 곤의 옛 세계를 부수는 거대한 날갯짓처럼 우리 또한 오래된 틀을 깨고 크게 기氣지개를 켜며 새롭게 변화해 날아오를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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