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2. 가능한 가장 먼 곳에 서서

by 천유

몇 자를 끄적이던 수완은 이내 결심한 듯 노트북을 접고, 가지고 온 책을 펴서 읽으려 애썼다.


자신만만하게 첫문장을 쓰고, 좌절하고. 고심끝에 다시 문장을 쓰고. 몇번을 반복하다 결국 울고 싶은 마음이들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끊임없는 좌절과 패기의 반복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기 힘든 날이 있다. 그게 하필 또 오늘인 것 같다. 오늘은 물러서기로 했다.


이런 날이면 소질이 없는 것 같아서, 없는 소질을 붙들고 앉아있는 자신이 갑갑하고 한심하게 여겨졌다. 단지, 애보기 싫어서 밥하기 싫어서 핑계를 대고 앉아 있는 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애를 낳았다고 애만 키우고, 꿈을 갖지 못하는 건 불공평한 일이다.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 같지만, 그래도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수완은 노력하는 중이다. 현실과 맞서, 시선과 맞서, 버티고 견디고 싸우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럴 땐 자격지심처럼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자격지심은 항상 수완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잘 떨어지지 않는 거머리같았다. 미혼이던 그 시절에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믿었기에, 소질이 없다 여겨지는 일도 그 자체로 좌절일 뿐, 갑갑하고 한심하지는 않았다. 내가 능력이 부족할 뿐 손목발목을 잡아 끌어앉히는 다른 이유는 무엇도 없었다. 언제라도 꿈을 꾸면 다른 무엇이 될 수 있으리란 '미래'가 있었다. 젊은 혈기라 치부하는 사람은 있을지언정, 그게 살림하기 싫어서 도망가는 거라는 눈빛은 없었다. 답답하다.


드르륵


'집으로 바로 갈게.'


남편의 톡이었다. 서준이 밥이든, 놀이든 보채는 모양이었다. 10살은 아직 보호자가 절실한 어린 아이였다. 설명이 없는 메세지를 확인했지만, 어느 정도 상황은 짐작이 가능했다. 도리어 '잘됐다'라는 생각이 든 수완은 바로 큰 배낭에 노트북이며, 필기구를 쏟아 넣었다. 카페를 나와 걸었다. 집으로 갈 생각이었다. 처음엔. 그러다. 그렇게 됐다. 걷게 됐다. 하염없이.


걷고 걸어 한시간을 걸었다. 비교적 도보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에 절, 금강사가 있었다. 동네에 위치한 작은 절이었지만 인적이 드문 야트막한 산에 위치하고 있어 조용히 산을 오르고 절마당에서 하늘을 보기 좋았다.


배낭을 짊어지고 걷는 일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지만, 오르막은 항상 숨이 찼다. 한발 내딛을 때마다 오른쪽 왼쪽 번갈아 앞으로 내민 허벅지를 손으로 꾹꾹 짚어가며 금강사 입구에 도달했다. 절마당에 다다르면 언제나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이 들었고, 그 느낌이 참 아늑했다. 비로소 숨어서 울 수 있다는 완벽한 안도감이 왈칵 몰려왔다. 그때마다 "됐다, 이제 됐어"라고 생각했다. 좀 쉬어야 겠다.


대웅전 문을 열고 불상 앞에 가만히 멈춰서 번 절을 했다. 세 번째 절을 하고 나서는 항상 납작 엎드려 있었다. 모습을 보인 적도 목소리를 들려준 적도 없는, 하지만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거룩한 절대자를 향해 뭐라 할 말이 있을 때도, 원이 있을 때도, 원망이 있을 때도, 늘 그렇게 납작 엎드려 한참 있었다. 가끔은 예상치 못한 울음이 절로 터졌다. 정말 울었다. 소리 없는 눈물은 오래된 나무바닥 위로 꽤 오래 떨어졌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다는듯. 조용하지만 부지런히 후두둑 떨어졌다.


수완의 남편, 도영은 자상하고 능력있는 사람이었지만, 섬세하고 살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수완의 생각에는 그랬다. 손을 내밀면 흔쾌히 잡아주는 사람이었지만, 웅크리며 떨고 있을 때 말없이 다가와 보듬어주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 먼저 손내미는 사람은 아니었다.


매사 차분하고 이지적인 남편에 반해 수완은 밝고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었다. 매사 긍정적인 수완은 웃음소리가 유달리 크고 맑았다. 대개의 성인 중에선 보기 드물 정도의 단순하고 저돌적인 성격의 그녀를, 후배들조차 '거리 위의 망아지 같아'라고 말하며 그 특유의 분위기가 수완에게 참 어울리고, 부럽다고도 했다. 수완은 그런 사람이었다. 주어진 성격이 견고한 정체성을 만들었고, 마치 그것은 벗을 수 없는 덧처럼 수완을 옥죄었다.


밝은 성격의 수완은 대개는 그런 이미지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 자신 스스로, 걱정 고민 없이 힘이 넘칠 땐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따금 인간인지라 느껴지는 좌절감이 물 밀듯 몰려들 때면 하염없이 허물어졌다. 자신만의 동굴에서 혼자 허물어져 울었다. 토로할 사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 아무도 몰래 그저 서럽게 한참을 울었다.


결혼이란 울타리,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지만, 서로에게 서로는 완벽한 파트너였지만, 서로의 세계는 너무나 견고한 성이었다. 수완의 남편 도영은 아직 어딘가에 있는 듯 했고, 수완도 자신만의 세계에 웅크려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온기가 절실할 때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거리는 사람을 더욱 외롭게 했다.


성장 과정에서 생긴 수완의 문제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문제다. 누구에게도 기댈줄 모르던 수완은 결혼을 해서도 기대는 방법을 몰랐다. 도영에게 손을 내밀지 못했다. 안아달라고 다독이고 보듬어 달라하지 못했다.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을 미리 두려워하고 있었다. 정작 도영은 자신도 좋고, 누구라도 좋으니 기대라고 했지만, 수완은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껏 기댈 곳이란 곳은 이번 생의 자신에게는 없는 선물 같았다.


기대어도 좋은 사람? 그게 누구일까? 떠오르는 후보군 몇몇의 얼굴이 스쳐지나갔지만 번번히 고개를 저어 지웠다. 기대면 상대가 무너지고 넘어질까봐, 기대어도 될 사람은 또 막상 기대면 정색하고 뒤돌아 설까봐. 상상속에서 넘어진 그 사람의 아픔은 수완을 더 아프게 했고, 정색하는 그 사람의 차가운 표정은 너무 두려웠다.


언제고 기어코, 안아줄 사람? 수완의 머릿속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반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은 기댈줄 모르면서 먼저 안아주고 지키고 싶은 사람은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온몸을 던져 어떻게든 지키고 싶은 관계는 있었다. 그건 가족이었고, 그건 도영이었고 서준이었다.


말없는 불상 앞에서 한참을 엎드려 멍하니 있던 수완은 부스스 일어나 꾸벅 다시 목례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가만히 서서 가능한 가장 먼곳을 바라보았다. 한참을 그러다 산을 내려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뒤를 돌아서서 하늘을 올려다봤을때, 대웅전 건너편 건물 처마에 동그란 수막재가 보였다. 연꽃모양. 오래전 책에서 봤던 모양은 달뜬 듯 둥근 표정의 온화한 미소를 띈 누군가였는데..


"수완이?"

"어?"


낯은 익었지만, 어디봤는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나, 모르겠어? 난 너 한눈에 알겠는데"


깔깔깔, 재밌다는 듯 조금은 서운하다는 듯이 웃는 저 표정과 목소리.


"아, 하지연? 너 지연이니?"

"그래, 나 지연이. 반갑다. 야, 이게 얼마만이야. 너 여기 살아?"

"어, 너는? 너도 세종에 살아?"


수완도 집과 학교가 모두 서울이었고, 기억에 지연은 집이 부산이라고 했었다. 둘이 이십년 뒤에 세종의 어느 작은 동네 절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니, 난 출장 왔어. 주말끼고 왔는데 뭐 할 일이 있어야지. 검색해봤더니 근처에 절이 있더라고."

"아, 회사 다니는구나. 어디?"

"칠양. 회사 연구소가 여기있거든. 우리팀이랑 연구원들이 같이 진행하는 프로젝트가 있어."

"결혼은 안했어?"

"아니, 했지. 했다가 돌아왔지. 트렌디하지?"


간밤에 꿈에서 봤던 그녀의 전 남친 허욱이 생각났다. 아직 욱이랑 만나고 있으려나? 그 돌아왔다는 결혼이 허욱과 한거였나? 질문이 꼬리를 물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다. 지연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 결혼이 욱이와의 결혼이었든 아니든 그럴 것이다. 상대가 아무렇지 않는 표정으로 웃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아는 나이였다. 나이 사십은.


커피 한 잔하자,는 지연의 말에 다시 카페로 돌아왔다. 걸어서 한 시간, 왕복 두 시간이 걸렸어야 했는데 지연의 차로 오니 금방이었다. 매사 덜렁거리고 겁이 많은 수완은 면허도 겨우 3년 전에, 차는 아직 없었다.


"여전하네, 독특해. 요즘 시대에 차가 없는 것도! 흔치 않은데, 불편하지 않아? 근데 너랑은 어울린다, 수완아."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말이지만 이런 반응도 많이 봐서인지 새롭지 않았다. 지연이 아니라도 대개의 반응은 이랬다. 차가 없다는 것은 수완의 모든 것을 말해주는 대표 수식어가 된지 오래였다. 호들갑은 수완의 몫이었는데, 지연도 세월을 타고 말이 많아졌다.


"넌, 뭐해? 여기 사는 거보면, 혹시 너도 연구소 다녀?"


뭐하냐는 질문에 죄 아닌 죄를 짓는듯 주눅이 들었었다. 애보고 살림하는게 죄는 아닌데, 이상하게 대답은 늦어졌다. 대개의 살림하는 아이 엄마들은 이런 기분이리라. 지연의 탓은 아니었다.


"아, 나는 집에 있고 남편이. 남편이 다녀. 남편 따라 내려왔어."


아아, 라고 지연은 말했고 그녀의 표정에 의외라는 생각이 비쳤다. 활달한 성격의 수완이 얌전히 살림을 하고 있다는게 낯설었던 것이다. 살림만 한다는 말에 많은 이들은 어색한 듯 아닌 듯한 분위기를 "남편이 돈을 잘 버나봐"라고 부럽다며 애써 무마하기 일쑤였다. 그 때마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그래, 이런 기분이 싫었다. 나를 물어보는데, 그 짧은 대답에 '나'는 없고 '남편'이라는 단어가 3번이나 들어갔다.


이 십년의 세월을 너머 만난 친구답게 짧은 근황토크가 이어졌고, 이후에는 수완도 지연도 옛 추억에 들떠 한참을 이야기를 나눌수 있었다. 스무 살, 여대생으로 돌아가는 일은 사십의 누구에게도 즐거운 일이었으니까.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주부는 주부대로, 돌싱은 돌싱대로 시름을 모두 잊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 둘 앞에 누군가 와 섰다. 10살 아이와 손잡은 그는 수완의 남편이었다.


"어? 집으로 바로 간다더니?"

"서준이가 엄마 데리러 가자고 해서 다시 나왔지. 기다려도 안오기도 하고."


앞에 앉은 여자가 누구인지 별로 관심도 없는 듯한 남편 도영에게 수완은 지연을 소개했다.


도영은 늘 수완에게 궁금한게 없었다. 행동반경이 별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옆에 누가 있어도 애친구 엄마거나 운동을 다니는 누군가겠지 정도로 생각해 묻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수완은 그런 그에게 무관심하다 핀잔을 줬지만, 도영은 믿음이라고 무심히 응수했다.


"오빠, 내 친구 지연이. 하지연. 대학 때 우리과였는데, 출장왔대. 아까 얘기했지? 우리 남편."

"안녕하세요."

"아, 네. 얘기 들었어요. 소식 안 끊겼으면 결혼식에도 갔을텐데 아쉽네요."

"야, 나도 못 갔는데 뭘."


둘은 전화번호를 교환하고 헤어졌다. 만나면 반갑지만, 돌아서면 추억할 게 별로 없는 사이였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01. 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