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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꿈

꽃봉오리를 감싸듯, 천천히 부드럽게

by 천유
아랫입술. 윗입술.
그리고 꽃봉오리를 감싸듯.
한꺼번에 부드럽게.

천천히. 천천히.


슬쩍 잠에서 깬 수완이 본능적으로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곤히 자고 있다. 지난 일주일 매일 퇴근 후 피곤하다고 하더니 꿈조차 꾸지 않는 듯 어떤 미세한 표정 근육조차 눈에 잡히지 않는다.


'뭘까. 욕구불만인 걸까?'


이상한 꿈. 하지만 싫지 않은 기분에 다시 스르륵 잠이 들었다.


허욱. 그는 그녀의 대학 동기였다. 182cm 큰 키에 다소 구부정한 몸짓, 굵은 저음의 목소리, 수더분한 말투와 배려 깊은 행동, 적당한 유머감각과 어수룩한 미소, 운동신경까지 뛰어난 허욱은 남녀 모두에게 인기가 많은 편이였다. 수완과도 친한 편이었지만 그녀의 관심은 그가 아니었고, 그의 관심도 그녀가 아니었다.


수완은 다른 대학의 누군가와, 허욱은 수완의 친구이기도 한 과동기 지연과 교제 중이었다. 통통한 볼에 유난히 하얀 얼굴을 가진 지연과의 교제 소식을 들었던 날, 왠지 빼앗긴 듯 소소한 질투가 일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미묘한 일렁임이었고 상대적으로 남자 학우가 귀했던 어문계열의 특성상 다른 여자동기들도 그런 기분을 느꼈었다. 맹세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벌써 20년이 지난 일이다. 대학 졸업 후에는 한번도 보질 못했으니, 전화번호도 바꾼 탓에 그 어떤 대학동기와도 연락이 닿지 않았고 당연히 욱이 어떻게 지내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프랑스에 갔을까? 거기 살려나?'


잠에서 완전히 깨 거울 속 자신을 멍하니 보며 욱을 떠올렸다. 보글보글 와글와글 평소보다 긴 양치를 하면서 문득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의 아버지는 프랑스에서 사업을 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아버지를 뵈러 방학마다 자주 프랑스에 간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다.


연락이 닿을리도 없거니와 새삼 연락이 닿는다고 한들, 달라질게 없었다.


"엄마, 아빠가 목욕탕에 가자고 해. 집에서 씻으면 안 돼?"


쪼르르, 서준이 곁으로 와 매달린다. 벌써 10살이 된 아들은 아직도 아기 같았다. 외동이라서 그런가? 수완은 아들의 아기 같은 투정과 미소를 볼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귀여움을 느끼면서도 언젠가 홀로 남겨질 아이가 걱정됐다. '저렇게 여려서 괜찮을까'라는 생각은 어느새 본능적인 슬픔에까지 치달았다. 하지만 냉정해지자, 그 순간마다 마음을 다잡았다. 생각은 생각일뿐. 아이의 먼훗날 불확실한 외로움을 이유로 자신의 미래까지 저당 잡힐 순 없는 일이다. 남편을 사랑했다. 아이가 외롭지 않을까 문득 걱정되고, 형제를 만들어주지 못해 미안했다. 안 돼, 안 돼. 마음은 마음일 뿐이다. 남편은 원했지만, 당사자인 수완은 둘째를 낳을 생각은 없었다.


남편 도영은 수완의 첫사랑이었다. 대학시절 만나 애닳는 연애와 불꽃 같은 6년의 사랑은 결혼으로 완성되었다. 결혼 이후에도 연애시절보다 애틋한 신혼생활을 4년 더 보낸 뒤 철저한 계획하에 아이를 갖고 낳았다. 모든게 항상 순조로웠다. 도영을 만난 이후로는 늘 그랬다. 도영과 함께라면 수완은 언제까지나 그 그늘 아래서 안정적으로 계획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틀림없었다.


모두 그녀를 부러워했다. 수완은 이미 완성형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외로웠다.


스무살, 서른살 무렵의 그녀는 불완전했다. 배부른 소리라고 다들 욕하겠지만, 그냥 그런 상태로도 충분했다. 회상 특유의 낭만이라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그랬다. 아무리 떠올려봐도 단언할 수 있다. 솔직히 홀로인 삶 그 자체가 화려했던, 대단한 사람은 아니었다. 대기업을 다니는 것도, 사회적 명성을 쌓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위태로움을 기꺼이 감내하고 다가오는 파도에 올라탈 열정이 있었고, 희망이 있었다. 하고 싶은 것과 해내고자 하는 것이 있었다. 꿈은 손에 잡히지 않아 더 애가 탔지만 그래서 하루하루 목표가 있고 '언젠가는' 이라는 의지가 있었다.


'지금은? 지금은...'


"목욕탕 갈 때, 난 카페에 내려줘."


수완은 요즘 글을 쓰고 있다. 뛰어난 글솜씨는 아니었지만, 우연찮게 쓴 글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작은 상을 받은 뒤로 매일 매달리는 중이었다. 그게 그녀를 번쩍 들어올려줄 동아줄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한줄기 빛만 보이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 빛 자체가 꿈이나 희망은 아니었다. 그저 빛을 따라 동굴 밖이라 믿고 싶은 그곳으로 간절하고, 진지하게 발걸음을 옮기고 싶었다. 수완에게는 먼 미래를 보장할 동아줄보다, 거룩한 빛보다, 당장 발걸음을 옮길 어떤 이유가 필요했다.


새장 안의 삶이 권태로웠다. 오후 2~3시가 되면 항상 숨이 막혔다. 오늘도 내일도 분명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적막한 고요가 매일매일 평화,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반복되겠지.


날고 싶다. 날고 싶다. 나는 날고 싶다. 부딪혀 떨어지는 아슬함도 때론 짜릿하게 느껴보고 싶다.


수완은 그렇게 생각했다. 저 먼곳을 향해 처음 날아오르며 느끼는 가슴 벅찬 두근거림, 설렘, 환희도 그리웠다. 모두 느낀지 너무 오래된 날 것의 감정이다. 한참을 날다 피곤에 지칠무렵 보슬보슬한 땅을 밟으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고 생각하며 꿀같은 시간도 맛보고 쉬고 싶다.


그래, 날아오르는 설렘, 그뒤에 따를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촉이 그리웠다. 그 끝에 뭐가 있을지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목표라는 핑계가 있다면 어디로라도 끝없이 날고, 걸어보고 싶었다. 다시 날개짓을 하고 싶었다. 그게 너무나 그립다.


"데리러 올거야?"

"목욕 끝나고 서준이 도서관 들렸다가 오면 이래저래 3~4시간 될텐데?"

"원래 그정도는 앉아있어."

"그래? 그럼, 기다리고 있어. 이따 올게."


문을 닫고, 차로 향하는 남편의 뒷모습을 봤다. 완벽한 사람이었다. 자상하고 다정하고, 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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