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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06. 2023

사돈의 삼일

2021년 11월, 전국이 잡히지 않는 전염병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즈음이었다.      


건강하던 아버님이 갑작스레 폐렴 증상을 보이셨고 '곧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고 의료진은 전했다.


처음 전화로 소식을 접했을 때, 상황파악이 힘들어 친정 부모님께 두시간 반이 되는 먼 거리를 바로 와주셨으면 한다고 무리한 부탁을 했다.      


친정아빠는 고령이시라 최근 운전을 점점 줄이시는 중이었고 특히 밤 운전은 하지 않은 지 오래 되셨지만, 다른 방법이나 선택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이가 들어도 막다른 길에 서니 오로지 엄마아빠만 생각이 났다.


사돈의 소식을 듣고 ‘어린 외손자를 맡아 달라’는 딸의 부탁에 아빠는 지체 없이 곧장 오셨다.      


다행히 위기를 넘기셔 이튿날, 집으로 가셨지만, 일어나기로 작정한 일은 잊지 않고 따박따박 일어나는 듯 10여 일 뒤에 다시 오셔야 했다.


아버님께서 정말 생을 다하셨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찬 새벽이었다.


전날까지 꼬박 10일을 당신 아버지 곁을 지키고 있던 남편이 잠시 집에 들려 모처럼 제대로 누운 첫 밤이었다.


달디 달았어야할 그날 밤, 남편은 밤새도록 아버님을 찾아다녔다고 한다.


찾아도 찾아도 계속 아버님을 잃어버리는 꿈. 그런 별나고 두려운 꿈. 


아버지 도대체 어디계세요, 참 거친 새벽이었다.


이른 아침. 별난 꿈이라며 푸석한 얼굴로 오랜 만에 회사에 나가보려던 남편이 차에 시동을 걸자마자 전화가 왔다.    


그렇게 자릴 지켰는데. 겨우 하루 집에 왔는데ᆢ 아버님은 그새 홀로 먼길을 떠나셨다. 마치 가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셨는지 작은 딸도 출근시키고 바로 그렇게.


남편은 그렇게 회사로 가려던 차를 돌려 바로 고향집으로 내려갔다. 다행일지 모르나 남편과 나는 앞서 처음 소식을 접하고 집에 온 뒤,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 어떻게 할 것인지를 미리 정해놓았었다. 다시 한 번, 친정부모님께 부탁드리기로.      


겪어보지 않은 일이지만, 삼일간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어두운 표정으로 울고 곡을 할 테고, 낯선 곳에서 제대로 밥을 먹기도 힘들게 뻔했다.


영문도 모를 아이는 아이대로 공포스럽고 힘들 것 같고, 그보다 큰 이기심은 감히 상상해볼 때 그 큰 슬픔 속에 아이 곁에서 아버님을 보낼 자신이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손자니, 마지막 가시는 길을 지키게 하는 게 도리가 아닐까 라는 고민도 짧지 않게 했다.


남편은 나도 자식이지만 부모의 도리도 생각해보자 “아버지도 아빠잖아, 그러니 그 마음 이해해 주실 거야.”라고 애써 웃었다.


“아빠, 아버님이 돌아가셨어. 바로 내려와야 할 것 같아. 아빠, 나는 지금 바로 출발해야 해. 아빠 오는 거 보고 가면 늦어. 앞집 아이네 부탁해놓을게. 그 애 엄마 전화번호는 문자로 남겨 놓을게. 조심해서 내려오고 도착하면 바로 좀 봐줘.”      


아빠에게 한통, 앞집 아이친구네 한통, 전화를 걸고 나서, 나도 시외버스를 타고 시댁으로 향했다.


그렇게 믿기지 않은 3일을 보냈다.      


남편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슬픔에 빠져 먹지도 잠을 자지도 못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 역시 아버님을 여읜 상실에 슬펐지만, 그보다 살아있는 내 남편이 어떻게 될까 두려워 따라 못 먹고 못 잤다.       


삼일 뒤, 일상으로 왔을 때 아이도 친정부모님도 밝은 모습으로 우릴 맞았다. 친정엄마와 아빠가 예상대로 엄마와 처음 떨어진 아이 옆에서 나의 빈자리를 사랑으로 잘 채워준 탓이었다.


친정엄마는 “얼른 씻어라”며 밥은 먹었냐고 물었다.      


식욕이 없어 식사를 거른 상태였지만, 휴게소에서 대충 때웠다고 말했다. 씻고 나왔더니 엄마가 손을 잡아 이끌었다.    

  

전기레인지 위에는 커다란 전골냄비가 놓여있었다. 엄마가 뚜껑을 열며 말했다.     

 

“유야, 잘 들어. 입맛 없고 피곤한데 밥할 정신도 없을 것 같아서 급한 대로 있는 거 꺼내고 사와서 등갈비 김치찜 해놓았어. 잘 먹으라고 신경 써서 했는데, 별로 맛이 없어서 속상하다. 맛있게 잘 됐으면 좋았을텐데. 그래도 꼭 잘 먹이고.”      


뒤를 돌아 냉장고 문을 연 엄마는 다시 쉬지 않고 말했다.      


“애 먹을 것도 필요할 거 같아서 멸치 좀 볶고, 반찬 몇 가지 해놓았어. 냉장고에 유통기한 지난 것 있어서 그건 버렸어.”      


따라오라며 다용도실 문을 연 엄마는 이어 말했다.  

    

“혹시 밥 안 먹히면 억지로 먹지 말고, 동네에서 꽈배기랑 떡을 좀 사놓았어. 금방 안 먹을 거면 냉동실에 넣고.”      


엄마는 부엌 설명을 끝내고 아빠에게 갔다. 아빠는 이미 집에 갈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아빠, 밤운전 힘들잖아. 자고 내일 가.”

“아냐, 오래 있었다. 너희도 쉬어야지.”      


장인어른 내외가 있으면 사위가 편히 슬픔을 풀어놓지 못하고 예의를 차릴까 걱정이 돼서 서둘러 떠나는 게 분명했지만, 나도 남편을 먼저 챙겨야 할 때라 더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집을 나서며 엄마와 아빠는 사위의 손을 꼭 잡았다.     

 

“좋은 분이셨는데, 우리 유 예뻐해 주시고. 시간이 되면, 여유가 생기면 시골에 가서 식사라도 같이 하고, 모시고 여행도 짧게 다녀오고 싶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 몰랐어. 많이 힘들겠지만, 좋은 데 편히 가셨을 거야. 우리도 가시는 길 뵀어야 했는데, 미안하네.”      


그렇게 엄마아빠는 준비 없이 서둘러 먼 거리를 와서 삼일을 보내고 쫓기듯 밤운전을 해 당신들 집으로 돌아가셨다.  

    

가시고 나서 보니 찬찬히 집을 살펴보니 엄마는 그저 3일을 보낸 게 아니었다.


3일 동안 사위와 딸이 신경 쓰이지 않게 어린 외손자를 보는 것은 물론 익숙하지 않은 동네에서 장을 보고 밥을 해먹고, 나아가 딸과 사위가 경황없이 보낼 며칠까지 준비해 놓았다. 그리고 철없는 딸이 미뤄둔 냉장고며 집 안 청소, 빨래까지 싹 해놓은 뒤였다.      


우리가 삼일장을 치루는 동안 엄마가 밥을 하며, 반찬을 하며 보냈을 3일이 그림을 그리듯 집 안 이곳저곳에 스크린처럼 떠올랐다.


사돈의 장례에 함께하지 못하는 대신 사돈의 자식이 살아갈 하루하루를 채우고 광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빈틈없이 3일을 보내고도, 함께하지 못한 시간을 못내 미안해하며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난생 처음 큰일을 치운 나는 상실의 슬픔과 남편에 대한 걱정으로 집안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지만, 내 몫의 일을 하며 일상을 살아내야 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엄마가 있었고, 남편에게는 사돈의 부재를 슬퍼하며, 그 새끼를 안쓰럽게 거두려는 장모님이 있었다.      


인생에서 가장 큰 일을 치룬 우리는 다음날부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한 무정한 일상과 마주했다. 작은 존재 하나 먼지처럼 사라진 일이 정말 세상은 아무렇지 않은가 보다.


별 수 없다. 우리도 그런 척 살아가야 한다.      


그래, 슬픔은 여전히 가슴속 머물러 있었지만 엄마가 해놓은 밥을 먹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씩씩하게 지냈다.      


평생을 밥을 하며 식구들 뒷바자지를 해온 엄마는 늘 나서는 법이 없었다. 엄마는 칠십 평생 항상 뒤에 있었다.


사돈의 장례에서조차 엄마는 묵묵히 따뜻한 밥을 하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얼큰한 찌개를 끓이며 엄마의 방식으로 사돈을 그리고, 사위와 딸을 뒤에서 말없이 위로하고 다독여 줬다.    

  

나는 알고 있다. 그것은 사돈에 대한 엄마만의 특별한 삼일이었고, 엄마만의 애도 방식이었다는 것을.


정작 엄마가 가면 누가 우릴 이렇게 거둬줄까.


생각만 해도 막막하지만 지금 이렇게 모르는 채 철없이 받고만 있다.    

  

하늘에 계신 아버님도 사돈이 있어 다소 마음이 놓이실 테다. 서로가 서로의 자식을 나눠가진 특별한 사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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