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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Oct 08. 2023

외탁

쓰는 이유, 쓰는 보람

"아버지, 저 왔어요."

"아버님, 저희 왔어요."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오, 그래. 유 왔냐.”


밖은 환한데, 방은 어둡다.


책상 위 초록색 전등갓에서 벌써 하얀 불빛이 잔잔하게 퍼지고 있다.


좌식 책상 위에 두꺼운 책을 펼쳐놓고 있던 할아버지가 안경을 벗으며 일어 서신다.


외할아버지의 시간은 멈춘 듯 항상 그대로 ‘얼음’.

“저, 왔어요.” 소리에 '땡'.   


 “그래, 유는 공부 잘 하고?”

 “아유, 공부를 해야 하는데 책만 읽어요.”

 “오오. 그래? 책을 그렇게 많이 본다고?”

 “네, 책을 빌려다 시험기간에도 밤새서 책만 봐요.”

 “그래, 그라믄 됐다. 그라믄 됐어. 우야든 간에 책 많이 보면 됐다.”      


무조건 ‘됐다’는 외할아버지의 느리고 따뜻한 음성에, 바닥만 보던 나는 그제야 눈을 마주치며 배시시 웃는다.


무척 똑똑하지만 너무나 괴팍해서 모두가 어려워한다는 나의 외할아버지. 친손녀와 아들을 가장 좋아한다는 나의 외할아버지. 나는 그런 외할아버지가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그림을 곧잘 그려 상을 도맡아 받았다. 수화기 너머 작은 외삼촌의 음성이 궂다.


“모땐 것만 닮았네. 니 우얄라고 그라노.”


혀를 차는 채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에 애정과 걱정이 가득 하다.


아들 욕심이 유난한 외할아버지에겐 아들이 둘이 있다. 미대에 진학하려다 평생 글쟁이로 사는 큰아들, 음반까지 냈지만 원대로 가수가 되지 못한 작은아들. 넘치는 사랑만큼 기대도 크셨겠지.


할아버지는 늘 아들들을 못마땅해 하셨다. 할아버지와 외삼촌 사이에는 알 수 없는 빙벽이 있었다. 단단하고 높은 벽은 섣불리 다가설 수도, 넘어설 수 없었다.


벽이 내 앞엔 없었다. 할아버지는 외손녀인 내게 욕심을 내지 않았으니. 여하튼 애증의 자식 둘을 외손녀인 내가 닮았다. 핏줄은 얄궂다.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영문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어학연수조차 다녀오지 않은 영문과 졸업생은 진로가 애매했다.


뭘 할까. 고민하다. 작은 광고회사AE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몇 번의 이직을 하는 동안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임신 초기 불안정으로 회사도 그만뒀다.


삶이 지속되는 동안 책은 점점 멀어지는 듯 했다.


그렇게 내가 살림을 하고, 애를 키우는 동안 애만큼 남편도 쑥쑥 자랐다.


잘난 아들만큼 나도 잘난 딸인데, 어째 뒤로 자꾸만 존재가 잊히는 것 같아서, 묻히는 것 같아서 속상했다. 남의 뒷바라지 하라고 내 부모님이 고생해서 키우고 결혼시킨 건 아닐 텐데.


'나는 이대로 그냥 아줌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걸까? 나는 엄마의 꿈이었을 텐데.'


아이는 그 사이에도 무럭무럭 자라 한글을 가르친 적 없는데 문장으로 말을 하고, 글을 읽기 시작했다. 미뤄 짐작컨대 집에 아빠의 책이 많은 탓이다.


아빠 책을 장난감처럼 손에 쥐어가며 기던 아이는 활자를 좋아했다. 아이가 자랄수록 한 권 한 권 사놓는 책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느끼게 됐다.


걸음을 곧잘 걸으면서부터는 프랜차이즈 중고서점을 놀이터 삼아 다니기 시작했다. 아이는 낮은 책장 사이를 오가기를 즐겼고, 이 책 저 책 꺼내보다 털썩 앉아 동화책을 보는 것을 좋았다.


그 땐 내게도 내 시간이 주어졌다. 아이가 그림을 보고 손가락으로 아는 글씨를 짚어가는 동안 나도 ‘고객이 방금 팔고 간 책’을 살펴봤다.


'요즘은 다들 이런 책들을 보는구나.'


육아에 멈춘 나의 시선이 사람들의 시선과 생각을 따라가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마음을 훔치는 문장이 곧잘 눈에 띄었다. 이내 소장욕구로 이어졌다. 


‘오늘은 한 권 사야겠다.’ 


아이가 바지자락을 잡고 저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본다.


  “엄마 이거랑 이거랑 이거 살래.”

  “이거 전부 살거야?”

  “응”   

  

책을 꼭 쥐고 나의 눈을 말갛게 보며 해맑게 대답하는 아이에게 한 권만 빼자, 엄마도 보고 싶은 책이 있어, 라는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책을 산다는 욕심을 버리고 눈으로 읽고, 문장을 마음에 새기려 애썼다. 


다음에 사야지, 라는 생각으로 책 제목만 사진으로 찍어가는 것도 여러 번이었다. 마음을 두드리는 책들은 그 제목만으로도 위로와 힘, 동기부여가 되었기에 책의 제목이라도 잊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눈으로 찍어둔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생각이 났다. 도서관. 도서관에서 아이의 책도 읽고, 내 책도 읽고, 시간도 유익하게 보낼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을 수는 없었다.


관내 도서관은 어린이 도서실과 성인의 일반 도서실이 병렬식으로,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다.


아이가 있는 모습을 고개만 돌리면 볼 수 있었고, 아이도 엄마아빠가 항상 보이는 곳에 있고 언제든 몇 걸음만 떼면 곁에 올 수 있어 좋았다. 같은 공간에 따로 있을수 있기에 각자의 시간이 보장되었다. 책을 읽는 동안 쓰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이 꿈틀거렸다.


읽은 책을 정리해서 SNS에 올리기 시작했고, 랜선으로 같은 공감대를 가진 이들과 소통이 시작됐다. 소통은 쓰기로 이어졌다. 글은 점점 길어져 단어에서, 문장으로, 문장에서 에세이 형식의 글로 이어졌다.


그러다 오랜 만에 호흡이 긴 장편소설을 읽었는데, 에피소드 형식이다 보니 술술 잘 읽혔다. 책속의 등장인물들은 내 안의 고민과 생각을 각자 나눠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시간을 함께 보내노라면 감정동화가 쉽게 일어났다. 그리고 어느 소설의 ‘작가의 말’에서 나는 무의식의 나를 봤고, 내 꿈을 처음 읽었다.  

    

‘나도 소설을 써보자, 한 번 해보자, 작가도 어느 날 이렇게 소설을 처음 썼다 잖아.’     


쓰는 일은 읽는 일만큼 즐겁다.


그동안 내가 읽었던 많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항상 각자의 자리에서, 저마다의 적절한 응원을 해주고 있다. 힘에 부칠 때는 쉬어도 된다고, 용기가 필요할 때는 나도 해냈다고 너도 할 수 있다고, 보잘 것 없는 무기력이 나를 누를 때면 끝내 우뚝 선 이들이 이건 바로 언젠가 너의 모습이라고 어깨를 감싸 안아준다.


내 인생의 각기 다른 챕터에서 그들은 자리를 지키며 나를 기다리고 있다. 묵묵히 한 장 한 장 써내려가는 내 글, 한 장 한 장 넘어가는 나의 삶의 페이지들. 그렇게 나도 쑥쑥 크고 있다. 책은 나를 끈질기게 키워냈고, 씨앗 같던 활자들은 마침내 내 꿈이 됐다.




언젠가의 내 생일에 엄마는 뭐가 갖고 싶냐 물어보다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엄마들은 딸에게 뭔가 물려주던데. 엄마는 좋은 가방도 없고, 반지도 목걸이도 없네. 엄마는 줄게 없네.”      


그때 나는 엄마에게 뭔가를 사달라고 말해야 하고, 그걸 오래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나를 위해, 그리고 엄마를 위해.


오래 고민하지 않고 ‘커다란 백팩’을 사달라고 했다. 책도 두 어 권쯤 들어가고, 노트북도 들어가고, 커피를 넣은 텀블러도 들어가는, 아주아주 튼튼한 백팩.


나는 엄마가 사준 백팩을 매고 오늘도 도서관으로, 카페로 간다. 그 가방이 있으면 난 언제 어디서든 책을 읽을 수 있고, 꿈을 펼칠 수 있다. 위대한 유산을 받았으니. 나는 내 길에 자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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