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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에게

닿을 수 없는

by 례온

만약에,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정말 만약에 말이야.


나는 아빠가 결혼했던 나이보다 훨씬 더 지나서(실은 이미 지났어 아빠), 훨씬 더 어른이 된 뒤에야 결혼하게 되겠지만, 그 나이쯤 되면 혼자서도 이것저것 척척 해내는 사람이겠지만, 혹여나 그때가 되어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나 그의 가족들 때문에 마음 아파 했으면 아빠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 조용히 참다가 내가 우는 걸 보고선 밥상을 다 뒤집어 엎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어.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부모들처럼 처음부터 화내고 교양없게 굴진 않았을 거야. 아빠가 그럴 사람이 아닌 건 내가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제일 잘 알아. (엄마가 첫 번째겠지) 아빠는 정말 곧 죽어도 품위가 먼저고 매너가 우선이었던 어른이라서, 아마 꾹꾹 끝까지 참아냈을 거야.


그런 아빠가 못 참는 거 딱 두 개가 엄마가 우는 거랑 내가 우는 거. 아마 내가 금명이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엄마가 울든, 내가 울든, 또는 우는 나를 보고 엄마가 따라울든 했을 텐데. 하여튼 둘 중 하나라도 눈물 흘렸으면 교양이고 뭐고 눈에 뵈는 거 없이 뛰쳐나왔을 것 같다는 상상을 했어. 평소엔 말 한 마디도 안 하면서, 분노할 땐 누구보다 차분하고 논리적으로 화낼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든든해졌어. 나도 그런 사랑을 받고 컸지, 그런 사랑이 당연한 줄 알고 큰 철부지같은 면모가 있었지,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마 내가 새로운 가족을 만들고 살아갈 그 단계에 아빠는 없겠지만 그래도 누군가가 쥐어주는 모독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지는 않겠다는 자신감이 들었어. 아빠라면 당연히 내 편이었을 테니까, 나는 내 손에 들린 모독을 그 인간들 면상에 집어던지고 나오는 공주님같이 굴어야지, 생각했어.


요즘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가 한창 인기인데, 나는 그걸 볼 때마다 아빠가 생각나.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아빠가 내게 준 사랑이 드라마 속 이야기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느껴졌거든. 알고보니까 그 드라마는 아빠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딸들을 울리기로 유명한 드라마래.


그래서 나는 그 드라마 정주행하는 건 포기했어. 아마 나는 어떤 장면을 봐도 아빠가 생각날 거야. 요즘도 취업을 준비하고 사회생활을 코앞에 두고 가장의 책임을 분담하게 되면서, 매일매일 아빠 생각을 해. 아빠는 이 모든 걸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어린 나이부터 해냈어? 솔직히 말해서, 아빠가 있었으면 이런 고생은 안 했겠지, 싶었던 생각이 들었던 날도 많았어.


그래도 나는 절대로 미워한다는 생각은 안 해. 그냥 한없이 보고싶고 또 보고싶어. 왜 요즘엔 꿈에 찾아오지도 않나 몰라. 얼굴 잊어버리겠어.


요즘따라 더 보고싶고, 또 나 많이 힘드니까,

한 번쯤은 와서 얼굴 비춰주고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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