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에게 남은 인간성은 대체 뭘까. 나는 내가 쌓아온 모든 인격을 강제로 버려야만 하는 기분을 느낀다. 이렇게나 못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마음으로는 진심으로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음에 허무하다. 나로 하여금 관성적인 불안함과 압도적인 죄책감을 심어준 당신이 참 원망스럽다. 그런 방법 말고는 사람의 관심을 끌 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하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다그친다.
아무도 내 생각을 물어보지 않았다. 내 삶의 3분의 1을 이렇게 사는 내내 누구도 내게 '왜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거야? 내가 모르는 너의 부분이 있어서 그런 거야?'라고 질문하지 않았다. 그 질문을 이제야 처음 들었다. 들이켜보니, 나조차도 내게 그런 질문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러게, 나는 왜 아직도 이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당신이 사라지는 게 두려워서,라기엔 나는 더이상 당신에게 그 어떤 애정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도 집이 나으니까, 라고 하기엔 집에 있을 때 나의 인격을 밑바닥을 친다. 그럼 내게 남은 건 경력이라곤 없는 무능한 역량이나 알량한 자존심, 그리고 감히 울타리 밖으로 나가긴 무서운 애매한 치기뿐인 거다. 결국 나는 이정도뿐인 사람이라는 걸, 내 바닥이 이렇게나 얕다는 걸, 그런데도 나는 그 깊이를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숨통을 조이고 있다는 걸, 당신때문에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또하나 놀랐던 건, 당신과 이렇게까지 부딪히고서 처음으로 공황이 오지 않았다는 점. 내가 강해진 게 아니라, 그만큼 당신이 내 인생에 사소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 영영 강해질 수 없는 내 곁에도 당장 그곳에서 나오라며 내 공간을 알아봐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 나도 알지 못하는 내 마음을 정면으로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이 세상에 살아있다는 것.
나는 내가 왜 사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당신이 죽는 걸 왜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죄책감도 아니고 두려움도 아니라면, 나는 왜 그 결말을 무서워하는 걸까. 오늘 내 마음을 물어본 친구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말하면서도 느꼈다. 나 지금 제대로 된 답을 모르고 변명만 늘어놓고 있구나. 늘 제대로 된 답을 향해서 달려왔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구나.
어쩌면 당신의 존재를 잃고 싶지 않은 건, 탓할 대상이 필요해서. 내 인생이 잘못됐을 떄 언제든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내가 나쁜 걸까? 난 잘 모르겠다. 왜냐면, 시간이 지나고 당신의 업보를 나에게 탓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나는 그 사람을 욕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정도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누구나 아는 것처럼, 불행은 대상과 시기를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사실 내게도 그런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친 걸지도 모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