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영화 채널에서 '아마겟돈'영화를 하길래 뒷부분 30분 정도를 봤다. 오래전 영화인데 굉장히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재난영화를 좋아해서 영화 개봉 전부터 보고 싶어서 안달을 내다가 엄마 아빠를 꼬드겨 영화관에 가서 관람을 했다. 엄마는 공부나 하지 웬 영화? 썩 내켜하지 않았지만 응해 주었고 아빠는 지금도 그렇듯 무슨 영화인지도 모른 체 그냥 가자니까 별생각 없이 따라나섰다.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 영화로서는 러닝타임이 길었던 이 영화를 나는 꽤나 집중하고 몰입하며 봤었다. 슬쩍 훔쳐본 아빠는 역시나 대사가 길어진다 싶으면 졸고 있었다.(때려 부수고 치고받고 싸워야 집중하는 스타일)
실패로 끝날 것 같은 작업이 극적으로 성공하며 지구를 지켜냈을 때 전 세계에서 환호하는 장면은 지금 봐도 가슴 떨린다.(뻔한 영화 클리셰이지만 클리셰가 쓰이는 이유가 있는 법이지). 맨날 세계는 미국이 구해?라는 생각은 할 겨를도 없이 그냥 지구 종말을 막았다는 데에 가슴이 벅찼다.(그리고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진짜로 미국이 구할 것 같긴 해. 사대주의는 아니고 그냥 현실적으로 그럴 것 같다구..)
영화관을 나오면서 나는 아빠에게 물었다.
"재밌다. 그치?"
아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진짜 재미가 없었나 보다.(마지막엔 막 땅굴(?)도 파고 지들끼리 싸우고 폭탄 터질 뻔한 것도 멈추고 박진감 넘쳤는데 왜왜)
"왜? 안 재밌어?"
"아빠가 죽었잖아!!"
아아... 그러니까 아빠는 영화 결말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거다. 딸의 남자 친구를 대신해 죽은 아빠의 고귀한 희생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거다. 못마땅한 거다. 기분이 나쁜 거다. 진짜 화가 났는지 한 마디 더 붙인다.
"가스나, 아빠가 죽었는데 지 애인한테 달려가는 거 봐라.."(와... 이 남자 보소. 엄청 몰입해서 봤는걸?)
뜨끔한 나는 더 말을 하지 못했다. 그 장면은 어린 내가 봐도 저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런 옛날 기억을 반추하며 보고 있는데 드디어 세계를 구하고 온 딸의 남자 친구가 우주에서 지구로 위풍당당하게 도착했다. 문제의(?) 장면이 이어진다. 딸이 기뻐하며 달려 나간다. 재회의 기쁨에 젊은 두 남녀는 끌어안고 키스를 한다. 아빠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이미 끝난 듯했다.
아빠가 화 낼만 했네. 과하네 과해. 너무 기뻐만 하잖아?
내 목숨만큼 사랑하는 상대가 사지에서 돌아오게 되면 그 기쁨과 행복이 다른 모든 감정을 덮을 만큼 강해지는 걸까? 사람도, 상황도 겪어보지 않아서 이건 뭐라 말할 수가 없네.
그런 둘의 행위(?)를 정당화시키려는 듯 영화의 말미에는(요즘으로 치면 쿠키영상) 둘의 결혼식 장면이 나온다. 아버지의 희생은 값진 것이었어요. 덕분에 우리 둘은 사랑의 결실을 이루었답니다. 짝짝짝. 같은 것? 이 장면은 기억이 안 났는데 어렸을 땐 아마 '와! 결혼했다. 다행이다.' 그런 생각으로 흘려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20년 뒤 그 장면을 보고 지금은,
결혼하면 끝이야? 행복이야? 아닌데 아닌데! 우리 이적 오빠 '해피엔딩'이라는 노래엔 [신데렐라 결혼 1년 만에 성격 차이로 헤어져 평생 혼자 살았을지도 몰라]라는 가사도 있다구. 라는 세상에 찌든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썩었어.
12월에 엄마한테 태국 가자고 했다가 임플란트 시술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까였다.
"그르므은..으은제 갈 수 있는데에~~!"
징징대고 있으니 아빠가 다가와서 한 마디 한다.
"너 왜 아빠한텐 가자고 안 하냐?"(참고 : 엄마-여행 몹시 좋아함/아빠-여행 꽤나 싫어함=>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임)
"아빠느응..여행 안 좋아하니깐. (양손 엄지 검지로 돈 모양을 만들어 망원경처럼 눈에 대고는) 아빠느응..돈이나 주면 돼애."
이 과년한 딸의 뻔뻔스러운 작태를 보라.
'아버지, 어머니 그동안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아직 능력이 부족하여 좋은 여행은 못 보내 드리지만 가까운 데라도 두 분 다녀오시라고 제가 약소하게 준비해두었습니다.'라고는 못할 망정 돈을 내놓으라니!
내 입에서 나오는 "나 가난해. 거지야."가 오래된 관용구이듯(슬픈 건 사실이라는 점) 이런 내 어이없는 태도에도 익숙한 일이라 엄마 아빠는 웃고 만다. 물론 속으로는 나잇값 못하는 저거 앞으로 어쩌려고 저러나 혀를 찼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순간이 아직 가능하다는 게 고맙고 행복하다. 아마겟돈 아빠는 20년 전에 죽었지만 나는 20년 전 함께 보았던 영화를 떠올리며 아프지 않게 그 기억을 추억할 수 있으니까. 여전히 철 없이 굴어도 용인되는 그럭저럭 한 상황과 별 탈 없이 존재해주는 가족이 있어서.
그래서, 그리하여, 그러므로 그런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감사해 할 수 있는 내 마음이 계속 유지될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나저나 아마겟돈 아빠도 같이 살았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어릴 때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그러면 영화의 완성도가 너무 떨어지는 걸까? 뭐 어때. 어차피 영화는 영화인데.
이적 오빠의 해피엔딩 노래 끝 부분 가사는 이러하다.
[신데렐라 결혼 1년 만에 성격 차이로 헤어져 평생 혼자 살았다 할지라도 그건 알고 싶지 않은 맘 아픔이 뭔지 아니까. 그저 해피엔딩까지가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