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sepina Dec 05. 2019

반드시 그때여야만 했어.

꽃보다 남자 15권을 찾습니다.

 친구와 함께 우리 동네에서 가까운 중고서점에 갔다. 특별히 볼일이 있었던 건 아닌데 밥 먹고 배불러서 발길 닿는 대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발견했다. '꽃보다 남자'

 내 또래 여자들이라면 모를 수 없는, 보지 않은 사람을 더 찾기 힘들, 명작(?) 만화.

 동남아권에서 드라마로 너무 많이 나와서 아마 남자들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우리나라 판은... 정말.. 캐스팅까진 좋았다고 보는데 원작이 있는데 저렇게 망치기도 쉽지 않았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에피 나열에서 끝난 게 아니라 산으로 가는 옴니버스 구성에 PPL이 드라마를 뒤덮은 그냥 90분 광고였다. 오죽하면 이민호도 꽃남은 못 본다는 말이 나왔겠는가.)

 사실 내겐 꽃보다 남자 만화책이 있다. 1~3권, 그리고 18권부터 끝까지


10년도 더 된 옛날에 언니가 만화방 정리를 하던 곳을 지나다가 꽃보다 남자와 풀하우스가 있다며 반띵(!)해서 사겠냐며 급히 전화를 걸어왔다. 대신 꽃보다 남자는 중간 부분은 없다고 했다. 가난한 학생 신분인 데다 전편이 없는 건 아쉬웠지만 둘 다 어렸을 때 너무나 사랑했던 만화책이었기 때문에 나는 두말 않고 사라고 했다.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는데 지금 그 만화책들은 우리 집에 와 있다. 그렇잖아도 작은 집에 정리되지 않은 잡동사니들 때문에 집이 터져 나가게 생겼는데 큰 수납장 한 칸을 만화책들이 차지하고 있다. 자리만 차지하고 있으면 애물단지겠으나 나는 이미 대사까지 거의 머릿속에 다 저장되어 있는 책을(연기가 안 돼서 그렇지 시키면 바로 대사가 튀어나올 정도로) 틈틈이 읽고 또 읽는다.(주로 기분이 가라앉을 때 현실 도피용으로 읽는다. 아? 요즘 읽어야 할 것 같네?)

 번외로 풀하우스는 대사가 엄청나게 많은데  그럼에도 주옥같은 대사들이 쏟아져서 꼼꼼히 읽으면 주말 하루를 다 바쳐 읽곤 했다.(물론 이 드라마도... 휴... 할말하않.. 그래도 꽃남보단 나았다.)

 꽃남은 중간이 없는 게 늘 아쉬웠다. 초등학교 때 만화방에서 만화를 빌려 읽을 때도(신간이 나오면 대여가 힘들어 내 차례까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읽었던 책을 읽고 또 읽어서 다음 장면, 다음 대사를 줄줄이 외우곤 했어서(잠깐! 쓰다 보니... 배우 지망생이었드나?ㅋㅋ) 없는 그 4~17권까지 어떤 에피소드들이 있었는지, 어떤 심쿵 장면들이 날 울렁울렁하게 만들었는지 기억하고 있었기에 더더욱 그 부분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래도 그걸로도 감지덕지였다. 그 책을 이만큼 소장하고 있는 경우도 아주 드문 일이었으니까. 초창기엔 친구들이 주말에 우르르 놀러 와서 우리 집에서 풀하우스, 꽃남, 사랑하는 1/4(이건 이대 점포정리 책방에서 내가 구입) 만화책을 조용히 앉아 읽고 가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아... 권당 구독료 받을 걸ㅋㅋ내가 이래서 부자가 못되나 보다. 뒤늦은 후회ㅎㅎ)


 그 없는 중간 부분을 찾은 것이다. 15,16,19권이 서점에 비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나는 사지 않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비어 있는지 확실하게 기억이 안 났기 때문이다. (이젠 정확히 외워서 저렇게 서두에 썼음) 15,16을 사면 될 것 같다고 생각을 했으면서도 뭐든 확실하지 않은 일은 저지르지 않는 성격이라 집에 가서 다시 확인해보고 와서 사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책은 권당 1500원밖에 안 했고 거의 새책이었다. 아니, 그냥 새책이었다.

 "안 살라고?"

 "집에 가서 확인해보고 다시 오게. 금방 오는데 뭐. 저렇게 중간에 덜렁 있는 거 누가 그렇게 급하게 사겠어?"

 "하긴.. 그렇네."

 멀었으면 금방 갔을지도 모른다. 마음만 먹으면 걸어서 15분 내에 있는 곳이었다. 일부러 가는 게 귀찮아 그쪽 지하철로 갈 일 있을 때 가지.. 했던 게 보름이 넘었다. 신나게 서점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는 처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늦었어요. 15권은 이미 팔렸다구요.

 15권이 사라졌다! 15권만 없어졌다! 누가 사갔다. 15권만!!

 아니, 누가, 왜 15권만 사갔어?? 15권만 사준 걸 감사해야 할 판에 나는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아 애꿎은 서점을 돌고 돌았다.(이 와중에 사진도 찍음) 아무리 둘러보고 책을 꺼내봐도 15권이 없어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16권 1500원을 결제하는데 그렇게 슬플 수가 없었다.

 집에서 16권을 읽는데 다행히 중요한 스토리는 16권에 있었다.(중요한 스토리 : 러브신 있는 장면/싫은 스토리 : 갈등만 키우다 마지막 장면에 갈등이 극으로 가며 다음 편에 계속.. 나오는 책.. 욕 나옴)

 그런데도 아쉽다. 못 사니까 자꾸자꾸 더 아쉽고 애틋(?)하다. 


 탓할 게 없고 그냥 내 잘못이다. 중간만 있는걸 누가 사겠어? 생각 자체가 잘못되었다. 나부터 벌써 중간이 없는 책을 가지고 있잖아? 지금 생각하니 멍청하니 그지없다.

 반드시 그때여야만 했다. 그때 샀어야 했다. 그때가 아니면 안 됐던 거였다. 나는 그걸 몰랐고 그래서 타이밍을 놓쳤고 구하기 힘든 그 책을 소유하지 못했다.

 인생 타이밍이라고 그렇게 늘 말하고 다니면서 정작 눈 앞에 있는 기회를 놓치다니.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얼마 전 다른 작가님이 '아버지와 함께 여행을 가겠다'라고 쓴 글에 '나중에.. 는 보장되어 있지 않으니 빠른 시일 내에 다녀오세요'라고 댓글을 달았더니 그 말 명심하겠다며 내게 고맙다고 했다. 그런 내가 '그깟' 만화책이란 생각에 함부로 '나중에'란 기약을 해버리곤 보기 좋게 된통 당한 것이다.

 취업만, 연애만 타이밍이 중요한 게 아니다. 매일매일, 매 순간 놓치지 말아야 할 타이밍은 늘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참는 겁니다. 어금니 꽉 깨물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