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osepina Jan 25. 2020

더 나아지고 싶다. 보여줄 수 있게.

'더 나은 노래' 뮤지컬을 보고

이제야 보고 왔다. 몇 년 전에도 했었지만 벼르고 못 가다가 마지막 공연 열흘을 남겨둔 시점에.

종교적 또는 정치적 색채가 묻어 있는 것이라면 그게 뭐든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는 나이지만 이 공연은 반드시 봐야만 했다. 이 뮤지컬을 쓴 작가가 나의 교육원 기초반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친구 하나를 꼬드겨 그렇게 13년 만에 선생님을 뵈러 갔다.  내일 가겠다고 할 때부터 그러시더니 선생님은 내 손을 잡고 연신 와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소극장인데 생각보다 많은 관객이 자리를 채웠다.

기획의도를 보자면 육체적 고난을 당한 자가 그것을 통과하여 더 나은 삶으로 거듭나기까지 과정을 그린 극으로 고난이 온 이유에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고난이 주어진 목적을 바라보며 생의 기쁨을 전한다는 내용이다.

 중반이 넘어가며 여기저기서 관객들의 훌쩍임이 들린다. 최근 힘든 내 상황과 겹쳐 나도 여러 번 눈물이 났다. 하지만 내겐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누군가는 고난에 함몰되지만 누군가는 그것을 통과하여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기도 한다고 쓴 선생님의 기획의도를 알기 때문이다. 그 고난이 뭔지 지켜보았기에 작가의 마음이 읽혔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지만 선생님은 큰 딸을 백혈병으로 잃었다. 내가 수업을 들었던 그 교육원 시절에.

 개강하고 두 번째인가 세 번째 수업. 동기들끼리도 아직 서먹했던 그때 이사장님인가 들어오셔서

 '선생님 딸이 백혈병으로 죽어서 오늘 수업에 못 오신다..' 고 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놀랐던가. 그리고 그다음 주 나는 사람이 껍데기만 남아있다는 표현을 저럴 때 쓰는 거구나 처음 알았다. 저렇게 수업을 하고 늦은 밤 집에 돌아갈 때 얼마나 힘 드실까, 딴에는 위로라고 하고 싶어 과제 말미에 짧게 편지를 썼는데 큰소리로 내 과제물을 읽으시다가 마지막에 쓴 편지를 눈으로 읽고 금세 눈시울이 붉어지셔서 작게 "고마워요"라고 하셨던 모습.  몇 달이 지나 조금 괜찮아지신 모습으로 수업을 하다가도 누군가가 쓴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이건 이렇게 표현하면 안 되는데.. 매일 놓던 밥그릇과 수저 자리에 앉을 사람이 없는..." 하다가 울컥하셔서 말을 멈추시던 순간. 그리고 일시에 모두 숨 죽이며 기다리던 그 영겁 같던 찰나의 순간. 나는 하나도 잊을 수가 없다.

이 와중에 일주일에 한 번, 두 시간짜리 드라마 작법 강의를 위해 한국방송작가협회에 나갔다.
(....)
놀랍게도 강의 시간만큼은 딸아이 생각에서 벗어난다. 숨을 쉴 것만 같다. 살 것만 같다. 지금 난 제정신일까. 이 와중에 픽션의 세계를 논하고 있다니. 이 와중에 어린 학생들 앞에서 내 지식과 경험을 늘어놓고 있다니.
(....)
나는 칠판에 "무엇인가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은, 보여줄 충실한 인생을 가져야 한다-안톤 체홉"이라고 쓴 뒤, 생목까지 올라온 울음을 삼켰다. 그리고 한참 만에야 수강생들을 향해 돌아섰다. 저들이 내 눈가에 맺힌 물기를 알아채지 못하길 바라면서.

-울지 마, 죽지 마, 사랑할 거야 中-

저 책 속의 수강생은 우리였고 나중에 책을 통해 안 사실이지만 우리의 개강이 임박했을 때 이미 선생님 딸은 재발해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다.

 열여덟에 백혈병이 발병해 자가이식, 타인 골수이식 모두 시도했지만 결국 재발해 스물한 살에 세상을 떠난 선생님의 딸. 13년 전 어릴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나는 그 참척의 슬픔을 가늠할 수 없다.


  그 고난의 시간에도 기록했던 글로(나중엔 고통이 너무 커서 한 줄씩으로밖에 남길 수 없었다고 적혀 있지만) 책을 내셨고 그 책으로 상을 받으셨다.

책으로 끝나지 않고 kbs 드라마 단막으로도 제작되었는데 극 중 딸 이름을 실제 큰 딸 이름 그대로 써서 드라마가 시작되자마자 내 심장이 벌렁거리기도 했다.

 나는 저 책을 10번 이상은 보았는데 주로 마음이 힘들 때 주말에 읽곤 했다.(주말에 읽는 이유는 저 책은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끊을 수 없기 때문에 한큐에 다 봐야 한다.) 그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선생님을 떠올리고 메일을 보내곤 했는데 어떤 대학교 사서가 학생들이 이 책을 자꾸 대여해가서 무슨 과제냐고 물은 적이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딸 또래 아이들에게 딸이 남기고 간 메시지가 있는 것 같다며 그게 딸이  태어나 세상에 준 영향력이자 짧은 생의 의미가 아니겠냐고도 하셨다.

 최근 카톡의 선생님은 행복해 보이셨다. 나는 살아지는 삶을 살더라도, 그 지난한 시간이 길어지더라도 언젠가는 슬펐던 인생의 부분조차 자연스레 안을 수 있는 날이 오는 걸까, 그게 인생인 걸까 감히 생각을 해봤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나는 그래서 눈물이 났다. 인생의 최대 역치의 고통을 겪은 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실제로 그 고난을 겪고 더 나은 삶으로 자신을 이끌었던 경험을 가진 사람이 온 마음을 다해 쓴 글이었다. 그 진정성이 결국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저토록 깊게 어떤 감정을 통과해내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렵고 부러웠다. 무섭고 슬펐다.

 공연이 끝나고 선생님을 다시 찾아 수고하셨다는 말과 함께 안아드렸다. "어땠니?"라는 질문에 쉽게 말하지 못하고 ".. 짧게 얘기 못하겠어요. 메일로 드릴게요"라고 대답을 우회했다. 잘못하면 울 것 같았다.

 "너 글 쓰는 데도 좀 올려주고.. 나중에 구독자 천명되면 나도 알려줘." 하셨다.

아...

브런치를 소개해준 사람이 바로 이 선생님이다. (나는 잘 모르는데 제자가 여기서 출간제의를 받았대.. 한번 너도 찾아봐..라고 하셨던) 두 달 전 근황 소식을 전했을 때,

 "어디 가서 찾으면 나도 니가 쓴 글 볼 수 있니?" 하셨는데

 "아.... 선생님... 그건... 너무 부끄러워서요... 구독자 천명쯤 되면.. 그때 자신 있게 알려드릴게요"했는데 그 말을 잊지 않고 계셨던 모양이다.

  '무엇인가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사람은, 보여줄 충실한 인생을 가져야 한다'는 첫 수업의 말이 이렇게 아프게 와 닿는다.

 그저 부끄럽기만 한 건 지금의 나는 열심히도, 충실히도 아니기 때문이겠지. 생의 의미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이들에게 위로와 치유의 시간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는 기획의도의 선생님 마지막 말에 난 어떻게 보답할 수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짜가가 판 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