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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epina Aug 07. 2020

내 뒤통수 내가 때리기

다 안다고 자만하지 말지어다.

 나는 헤어지는 걸 잘 못한다. 사람, 사물, 드라마, 그리고 환경까지.

 친해지고 녹아드는데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해서 그런지 익숙한 것과 헤어지는 데에도 꽤 긴 나름의 의식(?)과 마음의 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래서 환경을 바꾸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딱히 좋다고 할 수도 없던 집에서 오래 살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고 그랬기에 그 집을 떠나오며 좋든 싫든 간에 한동안은 정 떼는 작업과 더불어 새 집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생각했다. 전 전집에서 전집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새 집을 어색해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디 멀~리 이사를 다닌 것 같지만 코 앞에서 코앞으로, 다시 코앞으로 이사했다.(동네 지박령) 이런 좁고 작은 마음을 지닌지라 연고도 없는 지방에 혼자 살러 내려가거나 생판 아무것도 없는 먼 동네로 여러 번 이사를 잘도 다니는 사람을 보면 그 용기(내겐 감히 용기다.)와 결단력이 부럽다.

 이런 나를 알기에 이사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왔다. 이사 갈 집을 미리 여러 번 들락거리며 익숙해지려 했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초조해하지 말자며 나를 다독이기도 했다.(동네 이사가 그럴 일이야?라는 생각이 든다면, 앞에 서술한, '남들은 이해하지 못할 엄청난 스트레스'를 다시 상기해 주시길.)


 그런데 웬걸?

 이사를 하고 며칠간 1차 정리를 끝낸 후,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 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눈을 뜨고 낯선 환경에 놀라지도 않았고 '여기가 집이 될 수 있을까?' 의구심을 가졌던 공간이 이쁘다며 연신 흡족해했다.

 물론 기존 이사와는 여러모로 다른 상황이었다. 집주인이 바뀌며 부랴부랴 급하게 집주인의 다른 건물로 임시 이사(임시였는데 8년을 살게 됨.)를 했던 것과 달리 이번 이사는 1년 전부터 차근차근 준비했고 그 일정에 따라 충분한 마음의 준비기간(!)을 가졌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겐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단번에 익숙해진다고? 어른처럼? 하하하!

 늘 그렇듯 너무 쓸데없는 걱정이 많아서 겁을 먹은 거야. 나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나도 모르는 사이 발전하고 성숙했는지도 몰라.라고 셀프 칭찬과 자뻑에 빠지려는 찰나,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는, 몸에 배어있는 습관 두 개를 발견한다.

귀가 후 현관문 잠금장치를 거는 것과 출타 전 불 끄기.

 전 집에는 현관 걸쇠가 따로 없었다. 내심 그것이 조금 불안했어서 이사 전 현관에 잠금장치를 달았는데 집에 들어와서는 자꾸 잊어버리는 거다. 한참을 돌아다니다 화장실 가는 길에 발견하고 걸기를 몇 차례. 그나마 이것은 조금 적응이 되었는데 도무지  적응 못하고 있는 다른 한 가지가 불 끄기다. 전 집에는 현관 입구에 방 스위치가 있어서 신발을 다 신고 불을 끄고 나갔는데 지금은 스위치와 현관까지 거리가 있어서 불을 끄고 나가서 신발을 신어야 하는 구조다. 매번 신발을 다 신고 나서 나가기 직전, 불을 끄지 않았음을 인지한다. 시간이 많고 벗기 편한 신발을 신으면 다시 벗고 들어가서 불을 끄지만 아침 촉박한 출근시간 샌들 같은걸 신었을 경우 깨금발로 뛰어 들어가 불을 끄고 나온다.

 잊지 말아야지 하고서도 오늘도 같은 짓을 반복하다 보니 "에이씨.." 들을 사람도 없건만 나도 모르게 육성이 튀어나온다.

 몸에 박혀있는 습관이란 이토록 무섭고 강렬한 것이구나, 라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나를 안다는 것에 대해서도 자만할게 아니라는 깨달음이 다가왔다.


감독이 작품 속 캐릭터를 완벽하게 이해했다고 자만할 때 작품은 본 궤도를 잃고 방황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내 앞의 상대를 다 안다고 생각한 그 순간, 뒤통수를 맞을 일이 일어나고 만다.

-그들이 사는 세상 中 지오 내레이션-

 비단 상대에 대한 것뿐일까. 나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스스로에 대해서 잘 안다고 자만하다가 불쑥 튀어나오는 새로운 자아(!)에 놀라기도 하고 나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규정하는 순간, 그 덫에 빠져 다른 나의 가능성을 아예 차단해 버리기도 한다.

 시간이 필요할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빨리 적응한 나의 다른 모습을 평가하려는 순간, 그조차도 섣부른 판단이라고 경고한 내 몸의 습관이 알려준 것처럼.

 해본 적도 없고, 잘하지도 못할 것 같은, 먹고 살 (새로운) 일에 대한 걱정을 늘어놓았더니 지인이 말했다.

 "선생님, 근데 그건 모르는 거예요. 안 해봤잖아요. 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어요."

그렇다. 맞는 말이다. 과거의 나로 미래의 나까지 단언할 수는 없다. 시간이 걸릴 수는 있어도 '못할 나'로 미리 나 자신을 아는 척 해선 안된다.

 비록 지금은 여전히 깨금발로 다시 불을 끄고 나오는 나일지라도 그게 영원한 내 모습이진 않을 테니까.(근데 거의 한 달째 이러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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