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일 테면 속여봐. 티 나게 속아주마.
원래 이런 류(떡, 빵) 아이스크림 잘 먹지 않는데 신서유기에서 너무 자꾸 보여줘서 나도 모르게 둘 다 샀다. 광고주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그러면 속아줘야지 뭐. 그렇게까지 속이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지 않겠어? 내가 너무 좋다던가.."라는 대답을 듣고 너무 어이가 없어서(사실은 원하는 답이 아니어서 짜증남) 대꾸를 못하고 혀만 끌끌 찬 적이 있다.
이제 와 생각하면 그의 말에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진짜 악질적인 사기꾼들은 제외하고) 내가 못하는 일 중에 하나가 '속아주기'이기 때문이다.
거짓말 자체를 싫어해서(누구나 그렇겠지만) 내가 거짓말하는 것도 싫어하기에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거짓말보다는 차라리 묵비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거짓말한 게 아니고 말을 안 한 건데? 궤변 늘어놓기) 문제는 예민하고 눈치를 잘 보고 민감한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특성인, 공기의 흐름이나 상대의 작고 짧은 신호를 캐치해 진실 여부를 판별해내는 능력이 지나치게 발달돼 있어서 타인의 거짓말도 귀신같이 잡아 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거짓말할래? 너 지금 눈동자가 오른쪽 위로 올라갔거든?"
이성을 만날 때, 이젠 세련되게 날 속여 넘기면 그냥 모르는 척하겠다는 몇 년 전 내 선언(!?)에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근데.... 너를 속이는 게 쉽지 않지."
세상은 절망으로 가득찼고나...
그런데 조금은 억울하다. 그렇다고 내가 평생을 그렇게 깐깐하게 굴며 살아온 건 아니기 때문이다. 내 딴에는 모르는 척 넘어가는 일들이 꽤 많았다. 남녀를 불문하고 말이다. 내가 눈감아 주는 것을 상대도 알아야 내 노력이 빛을 발하는데(!) 너무 연기를 잘했던(?) 탓인지 그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거짓된 말과 행동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고 반복되더니 더 큰 거짓말로 몸뚱이를 부풀려갔고 결국 참다못한 나는 종국엔 소리를 내지르거나(남자의 경우) 조용히 연락을 끊는 것으로(여자의 경우) 관계를 마무리했다.
'역시.. 아무리 작은 거짓말이라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들은 일찍 끊어내야 해.'
득의양양. 내가 이긴 것처럼 승리감에 도취됐던 것도 같다.
이기고 지고의 문제였을까?
거짓말은 나쁘다. 사소한 거짓말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람은 여전히 신뢰할 수 없다. 그래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그렇게까지 화가 날 일이었는지. 내 안의 다른 문제와 충돌하여 더 큰 분노를 만들어낸 건 아니었는지.
나는 또 화가 나 있었고 떽떽거리며 따지기 시작했다.
"내가 만만해? 어? 너는 내가 만만하냐?"
또 시작이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을 짓던 구썸남은 드르릉 거리는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니가.. 만만한 사람이냐?"(말 같잖은 질문인 거 너도 알지?)
"아니... 아니지.."(어..? 이게 아닌.. 데?)
예상하지 못한 부가 의문문 같은 되물음에 당황한 나는 엉겁결에 대답을 한 후 샐쭉거리며 입을 닫았다. 그는 '그럼 상황 끝?'이라는 듯 이 사안에 더 이상의 첨언을 하지 않고 길길이 날뛰던 나를 잠재웠다. 그러니까 '너처럼 예민하고 눈치까지 빨라서 무당처럼 하나씩 다 짚어내고, 거기다 지레짐작, 억측의 달인으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자존심까지 세서 절대 먼저 패를 보여주지 않는 인간이 만만할 수 있겠냐? 너도 너 자신을 한번 생각해보고 말해.'를 한마디로 정리한 셈이었다.(어라..? 이 놈 난 놈이었네..)
경계심 강하고 의심까지 많은 나는 잘 속는 타입은 아니다.(자소서 쓸 때엔 '신중함'으로 바꾸어 포장한다.) 그런데도 당하고 속을까 봐 늘 날을 세우고 있다. 누군가 나를 만만하게 볼까 봐 5분 대기 전투태세이다. 왜? 뭐 땜에 이렇게까지? 그냥 살기에도 피곤해 죽겠는데?
모든 걸 확대 해석한다. 세상에 '그냥'이 어딨어?! 개똥철학의 논리로 작은 거짓말도, 변명도 모두 나를 우습게 알아서, 나를 무시해서 그런 거라며 날 속이려 드는 모든 것들에 화내고 분노하며 절대로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겠다고, 지지 않겠노라고(?) 수시로 다짐한다. 구~~남친의 말처럼 나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한 거짓말이었을 수도, 순간을 모면하기 위한 사소한 변명이었을 수도 있는데 나는 내 존재 자체가 부정되고 외면당한 것처럼 그럴 때마다 부르르 떨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했다.)
"쳐다보길래 무시한다고 생각해서 찔렀습니다." 묻지 마 범죄자들의 범행 동기를 들을 때마다 병세가 심해지면 나도 저런 피해망상 환자가 되는 건 아닌가 분노 이전에 두려움이 먼저 밀려올 때도 있었다. (미치는 건 니 마음대로 될 거 같니?라고 팩폭을 한 친구가 있었....)
있는 그대로 보고, 말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 내겐 꽤 힘들고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다. 똘똘 뭉친 내 안의 자격지심을 해결하지 않는 한, 안 먹는 아이스크림을 PPL 때문에 샀다고 패배자라고 말하는 진짜 패배자 같은 생각을 계속 반복할 것 같아 조금 아찔해졌다.
인기 프로에 협찬하느라 돈 깨나 쓰고 저렇게 광고하느라 애쓰는데 어디 한번 먹어주지 뭐! 하는 대인배(?) 같은 배포(??)도 부려보고, 내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길래 저렇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나 한 번쯤(두 번은 안됨) 눈 감아주고 그러고 싶다.
몰라서 속는 게 아니고 알면서 속아주는 거니까.
확대 해석해서 스스로 자존심에 스크래치 내지 말고 가끔은 멋대로 생각해서 자존감을 높여주고 싶다.
PS 1. 신서유기 아이스크림 하나로 또 멀리멀리 왔다. 그래서 신서유기 아이스크림 평가는? 산지 좀 지났는데 아직 둘 다 냉동실에서 옥체보전 중이다. 이번 주 금요일 신서유기 재방을 보며(본방은 너무 이르다. 꼭 바로 하는 새벽 재방을 보는 인간) 전기장판 안에서 '따뜻한데 추워'하며 먹을 계획이다.
PS 2. 이 글을 쓰는 중에 대화만 시작했다 하면 헛소리 배틀 붙는 지인과(진지한 얘기로 시작해도 결국 이야기의 98% 누가누가 더 웃기나 게임) 이야기 끝에 나온 대화. 역시 나를 잘 아는 이는 가장 무서운 존재다. 이 글의 주제를 말하고 있었다. 내년에는 은근슬쩍이 통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