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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sepina Dec 09. 2020

껌 좀 씹었다. 오늘 하루.

남의 생업을 왜 함부로 흔들어대는가.

아직도 내가 인생에 대해 모르겠는 것은 이런 대목이다.
잘못한 것도 없고 최선을 다했으나 잘되지 않은 일에 대해.
더구나 굳이 원인을 찾자면 상대편이 훨씬 질책할 이유가 많은 것에 대해 우리는 수치심을 경험한다.

 -공지영, '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 中-

 간만에 분노와 우울함이 한계점을 넘었다. (둘은 늘 짝꿍.) 왜 한계를 넘었는지를 알았냐면 자다가 새벽에 깨서는 다시 잠들지 못했기 때문이다.(평소에는 아침잠이 과도하게 많다. 해가 늦게 뜨는 동절기에는 겨울방학이 간절하다.)

 분하다. 짜증 난다. 배설 글을 휘갈기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나간 여행기를 기다린다고 했던 분이 계셔서(한 분..) 다음 여행기 '괌 이야기'를 진짜 써야지 생각했고, 여행 매거진 구독자도 몇 분 계시고(진짜 몇 분 '만' 계심), 때마침 얼마 전 괌에 다시 가는 꿈을 생생하게 꿔서 이제 진짜 써야겠다고 다짐했는데 일단 이 글을 먼저 새치기시킨다.(쓰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건 아니다... 아닐걸..?...) 게다가 내일은 코로나 때문은 아니지만 건물 통제로 재택근무를 해야 한다. 조금 더 늦게 자도 된다. 새벽에 쓰는 우울 감성(울분 토하기)이라니 딱이다. 오늘이다. 써야겠다. 맥락 없이 앞뒤 없이 일필휘지로 화를 쓰겠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 정말 싫은데 결국 생각의 끝에는 '내가 뭘 그렇게 잘못 살아서'에 도달하고 말았다. 남들보다 열심히, 남들보다 더 노력하며 살았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민폐 끼치는걸 극도로 싫어하는 이타심과 싫은 소리 듣는 걸 끔찍해하는 자기중심적 면이 상호작용 한 결과, 적어도 업무가 변경되거나 이직을 할 때 '선생님 덕분에 정말 편하게 일 했습니다'라는 말을 들어온 삶을 살았다.(이런 말도 꼭 일 잘하고 인간성 좋은 사람들이 했지, 비협조적이고 불성실한 사람들이 하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이 소소한 성취감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런 인정은 아무 의미 없다는 듯 한 번의 공격으로 난 무너졌다. 세상엔 그런 일들이 잦더라. 부지불식간 한방의 어퍼컷으로 상대를 KO 시킬 수 있는 일. 상처 받아도 서러워도 하소연할 곳도 없다. 그저 내가 힘없고 못난 탓이라 당할 수밖에 없고 참아야 하는 게 유일한 현실인식 이자 해결책이란다.

 노력한다고 다 이루는 게 아니고, 성공하지 않았다고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라는 어제 읽은 글에 큰 위로를 받은 지 3시간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이 먹어서 이뤄놓은 것이 없는 게 슬픈 게 아니라 이뤄 놓은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닐 때 더 큰 절망이 찾아온다는 데 이뤄놓은 게 1도 없어 슬플 것이 없는 나는 그래서 슬프기도 했고 절망스럽기도 했다.(뭔 소리지..? 일필휘지의 부작용...)


 살다 보면 그런 일, 생길 수 있다고 할지 모르겠다. 별 일도 아닌데 예민하게 받아들인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틀렸다. 그런 일은 애초에 생기지 말았어야 했고 발생하지 않았다면 나는 '내가 또 예민해?'라는 생각을 할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에겐 그저 '실수'이고 '잘 몰라서' 행한 일 일지 모르나 타인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자가 '을'에게 생각 없이 범하는 말과 행동은 갑질이 될 수 있으니까. 그런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더 신중하고 조심했어야 하는 게 맞다. 그건 배려가 아니고 의무이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개구리가 된 나는 덕분에 초라하고 비참한 내 처지를 하루 종일 곱씹으며 비관과 비탄에 빠졌으니까.

 새벽에 뜬 눈 감지 못하고 생각은 생각에 꼬리를 물고 가지 말아야 할 곳까지 다다랐다.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하고 살았지?'

'이런 일이 앞으로도 생기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나?'

'그럴 때마다 난 이렇게 비굴해져야만 하는 걸까?'

 하지만 생각의 정지 버튼을 눌러보려 애쓴다. 잘못한 건 내가 아니다. 잘못한 건 그들이다. 우울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더라도 그들로 인해 수치심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런 부정 편향을 이어가면 내가 태어난 게 잘못이고, 그럼 엄마 아빠가 잘못이고(으잉), 전생까지 거슬러 올라갈 텐데 그럼 또 결국은 내가 잘못이라고? 싫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자조적으로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라고 체념과 포기를 섞어하는 이 말을 나는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듣기 싫어한다. 그렇지 않아도 내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서 자책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은데 주변에서 이런 소리를 들으면 모든 잘못의 귀결점을 본인으로 정해놓는 것 같아서 힘이 빠진다. 이 말을 믿지도 않고.(물론 믿으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작년에 한국사 시험공부할 때 고대 업설은 왕권강화와 계급사회 정당화를 위해 지배층이 만든 거라고 배웠거등요.)

실로     (고개 절레절레) 관두자. (피곤한) 하..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서..
제후     (갑자기 목소리 높이는) 야! 그런 소리 하지 마. 전생 타령. 딱 질색이야.
실로     (왜 이러나 싶어 멈칫하며) 뭐가?
제후     전생의 나를 지금의 내가 하나도 기억 못 하는데 그게 무슨 나야. 다른 사람이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지! 왜 이월을 시키냐고. 너! 영화에서 감독 다르고, 주인공 다른 시즌2  나오면 그게 같은 영화로 연결되냐?

얼마나 듣기 싫었으면 언젠가 대본에 썼던 대사.
남주가 여주에게 과거에 그만 좀 얽매여 있으라는 뜻으로 한 말이라(나름 복선..) 결은 좀 다르지만.
어쨌든 간에. 좌우지간. 애니웨이.

혹시나 내 잘못이 아닌 일로 자책하고 창피해하고 수치심까지 느끼며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말자고 이야기하고 싶다. 내 잘못으로 되돌아온 결과를 반성하고 인정하는 것 까지가 내 몫이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까지 이해해줄 필요는 없다. 이해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상대의 사과가 있는 시점부터 시작되어야 한다.(하지만 이런 류의 사람들이 사과를 하는 경우는 좀처럼 없다.)

 마무리를 공익적(?)으로 끌어가고 있지만 결국은 나한테 하는 말이다. TO ME, '그러지 마. 부정적인 생각을 이어가지 마. 니 잘못이 아니야.'셀프 위로하는 중인.. 뭐 그런 것이다.(좀 오글거리니까 흐지부지 얼버무리기...)

 자다 깨서 또 화가 치밀어 오르지 않게 수면 영양제를 하나 먹고 자야겠다. 저작운동이 불안과 긴장 완화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충동구매로(?) 껌도 샀다. 풍선껌이네? 오랜만에 풍선도 불었다. 단물 빠진 껌은 예쁘게 휴지에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이어진 이 끈덕진 감정도 씹던 껌과 함께 버려지길.

BIG 풍선은 사실이었다. 대신 턱관절은 조심해야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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