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엔 진짜 극 연말에 방송 3사에서 가요대상, 연예대상, 연기대상을 겹치지 않게 몰아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그런 정형화된 룰도 없어진 것 같다. 아직 시즌이 아닌 것 같은 12월 중순에 시상식을 하기도 하고 또 31일에는 그 축제 대신 영화 방송이 편성표를 차지하는 일도 심심찮게 보곤 했으니.
5~6년 전까지만 해도 뭐 대단한 거라고 돌아가며 그 시상식을 꼭꼭 챙겨봤었다. 2014년 보라카이에서 태풍으로 발이 묶이며 마지막 날 집에서 편히 시상식 봐야지 했던 계획이 어그러졌다고 공항에서 노숙하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던 기억이 있으니까.(아... 나 언제 2014년 여행기까지 다다를 수 있을까..)
그냥 시상식을 챙겨 보는 게 일 년을 마무리하는 나만의 의식 같은 거였다. 그랬는데 최근엔 시상식이 나오면 채널을 돌린다. 재미가 없다. 드라마는 끊은 지 오래라 연기대상은 아는 게 하나도 없고 가요대상은 아는 가수보다 모르는 아이돌이 훨씬 많고 그나마 예능은 많이 보지만 채널이 다양해지다 보니 막상 지상파 예능은 챙겨 보는 게 방송사별 두어 개 정도다.
올해는 딱 하나. SBS 가요대전을 보기로 했다. 나의 최애 가수님이 출연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 나오지? 연말 행사 그거 더럽게 길게 하던데 언제 나올 줄 알고 그걸 계속 보지? 검색하면 큐시트가 있으려나? 생각을 하면서 시작 시간에 맞춰 TV를 틀었는데 오호라. 1번으로 나왔다. 등장과 동시에 카톡이 울린다. 아마도 나의 지인들이,
이걸 보고 있자니 조카가 사족보행에서 벗어난지 얼마 안됐을 무렵, 나도 요구르트에 빨대 달라고 소리 쳤더니 엄마가 조카에게 너나 이모나 수준이 똑같다며 혀를 차던 게 생각난다.
방탄을 기다리는 조카를 달래주고 이모 오빠 또 나오면(여러 명과 하는 콜라보 같은 무대가 있을까 봐) 알람 해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거실로 나간다.
연휴를 끼고 이틀 휴가를 내고 엄빠 집에 간 상태였다.(5박 6일 동안 문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은 격리에 최적화된 인간. 어떤 날은 11시간 자고 일어나서 거실로 나갔더니 아빠가 박수를 쳐줬다...)
집에 머무는 동안 매일 한 시간 정도 엄마에게 마사지를 했는데 그러다 보면 자연히 엄빠가 보는 프로를 같이 볼 수밖에 없었다.(그리고 엄마에게 마사지를 해주면 아빠가 돈을 줬다. 신비로운 출금 시스템)
트로트 프로그램은 되게 신기한 게 매일 같이 방송사별로 돌아가며 있었다. (보는 그들도 프로그램 이름을 자꾸 헷갈려하더라.) 나는 미스 트롯도 봤다가 트롯 전국체전도 봤다가 트로트의 민족도 봤다.(와.. 난 외웠네?)
"재밌어. 너도 봐." 엄마는 시작 전부터 들떠서 말했다.
안 재밌는데... 난 노래도 모르는데... 왜 재밌으라고 하는 거지? 했는데, 재미있어서는 아닌데 어느샌가 잔뜩 참견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딱 봐도 못하게 생겼는데?"
"겉멋만 잔뜩 들었네. 쟤는 가수가 하고 싶은 게 아니고 그냥 연예인이 하고 싶은 거야. 그냥 어디든 기웃거려서 뜨고 싶은 거네. 관종. 허세. 어휴."
"저렇게 흉내만 내면 그때 이슈 되고 끝이야. 플러스로 자기 꺼, 특색이 있어야지"
나, 심사위원임?? 박선주임??(그러고보니 박선주가 심사평을 잘하길래...'저렇게 냉정히 심사하는 사람이 있어야지, 다 잘한다고 하면 안 된다'라고 심사위원 평가까지 했다...)
사실 그 시간 내가 보고 싶은 프로는 시상식도, 트로트 프로그램도 아닌 그 시간 늘 정규편성으로 방송되는 EBS 명의였다. 본방을 빼놓지 않고 시청하는 열혈 시청자로서 마사지를 끝내고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명의를 보고 있는데 조카가 가요대전 보고 있느냐며 다시 말을 건다. 음... 같이 봐줘야 할 것 같다. 명의가 끝나고 다시 채널을 돌린 후 정말로 마지막에 방탄이 나왔다.
이게 이럴 일이야? 싶게 방탄의 무대를 집중해서 봐본다. 조카가 좋아하는 아이에겐 좀 더 눈길이 간다. 아, 근데 난 저렇게 잘생긴 스타일보다 OO처럼 잘생긴 스타일이 좋은데.. 멤버들 얼평을 하며 혼자서 의미 없는 고민의(? ) 시간도 가져 본다.
꼭 코로나가 아니어도 나에겐 연말이 의미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그저 빨간 날이 휴일이냐 아니냐를 따지고 이왕이면 월요일이나 금요일이면 좋겠다 정도의 소박한 바람이 내가 원하는 최대치일 뿐. 새해 계획이나 소망 같은 것을 그리는 것도 마지막이 언제였나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말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꼭 그 반대로 이루어지는걸 몇 번 겪은 후 생긴, 인생에 대한 나름의 저항 의식이자 복수심(?)이다.
12월 31일이나 1월 1일이나 똑같은 하루가 흘렀을 뿐이고 인간이 편의상 나눠놓은 날짜에 의미를 부여해 본들 진짜 팩트는 나이 한 살 더 먹었다는 명백한 사실 하나라 결국은 기분이 나빠지기 때문이다.(모든 결론을 이렇게 부정적으로 빼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아마 그런 생각이 굳어지면서 시상식을 보는 것도 멈췄던 것 같다. 한해 끝 조촐하게 치렀던 나만의 의식(시상식 보기, 주변 사람에게 선물하기, 메시지나 편지 쓰기 등등)을 하나하나 없애는 것.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최대한 무덤덤해지는 것.
2020년을 마감하는 글들이 브런치에 넘치는 것을 보면서도 오히려 다들 하니까 나는 할 필요가 없다고, 또는 나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대세를 거스르는 마이너)
그러던 중 조카와의 메시지 창을 다시 열어 보면서 그날의 내가 새해에도 바라는 내가 아닐까 생각했다.
아이돌을 보며 조카와 이야기 나누고 엄빠의 트로트 프로그램 대화에도 참여하는 나.
그러면서도 일관된 취향을 유지한 채 늘 같은 시간에 방영되는 명의를 보며 무탈한 일상을 이어나갈 나.
그리고 균열 없는 그런 일상을 계속 이어가게 해주는 데 핵심 역할을 해줄 주변 사람들의 평온한 인생.
유독 올해는 나와 주변 사람들의 건강 문제로 '살아있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고 삶의 허무함과 덧없음에 많이 헛헛해하면서 동시에 삶에 대한 애착을 재정비하기도 했다.
그 어떤 원대한 꿈도 희망도 스러져버린 죽음이나 무너진 건강 앞에서는 아무 소용없다는 걸 실전으로 깨닫고 난 뒤엔 '건강'이외의 것들은 한낱 지나가는 바람처럼 인생을 크게 흔들 수 없음을 알아버렸다고 할까. (도를 닦으러 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더더욱 거창한 새해 계획이나 포부 같은 것은 와 닿지 않는다. 그냥 건강하게 살아만 있고 산 입에 거미줄 칠 정도만 아니면 매일이 재난이고 전쟁인 삶 속에서 그 또한 감사한 일 아닐까.(소박해진 건지, 긍정적이 된 건지, 기대할 것이 없는 슬픈 염세주의자의 체념인지 나도 모르겄다..)
자격증 몇 개 따기의 구체적 계획은 없어도, 영어 공부 시작하기의 거국적 계획이 아니어도 크리스티 추리소설 전집 다시 읽기의 소소(가 아니다.. 전집 엄청나다..)한 계획과 나를 드러냄을 부끄러워하지 말자는 작은 다짐 정도여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아주 조금씩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어 내년에 1g이라도 성숙해지는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뭐... 발전하면 좋겠지만 아니어도 크게 상관없을 것 같다. 모두가 똑똑하고 훌륭한 사람일 필요는 없는 것처럼. 잘해야 한다는, 잘 살아야 한다는 그 강박을 내려놓는 것만으로도 내 인생은 좋은 방향으로 가는 것이겠지.
이상, 무계획이 계획이라는 그럴듯해 보이는 말을 앞세워 결국 계속 게으른 완벽주의자로 살겠다는 30대 독거(노)인의 고백 및 선언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