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_ 주말
주말.
아직 자고 있다. 그럴 만도 하지. 요즘 너는 야근이 잦다. 겨우 잠든 내 몸을 침대 미동으로 두어 번 흔들더니 나란히 눕는다. 붙박이장 쪽으로 걸어 들어오면 어디 덧나냐고. 어제도 무릎으로 날 가로질러 눕더라.
빛이 들어오면 제대로 눈을 붙일 수가 없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기어이 골아떨어진 눈가에서 인스타그램을 하네! 속으로 탄식했다. 한동안 고요하다 났던 찰칵 소리에도 뒤척였다.
어제 옆자리 은영 씨가 명절 선물을 받자마자 스토리를 찍어 올리길래 같은 생각을 했는데. 인스타그램 스토리 기능은 왜 없어질 태세를 보이지 않는가. 몇 초 후, 그래. 너와 은영 씨가 세상에 몇천만. 많게는 억일 텐데. 그래서 쭉 존재하겠지 뭐, 했다.
'우리 집 가장 2가 안 들어왔는데 먼저 자는 가장 1'
분명 나를 찍곤 그렇게 글자를 올렸겠지. 한두 번은 쑥스러워서 하지 말라고도 했는데. 역부족인걸 알아챈 지 꽤 됐다. 대학 때부터 인플루언서니 뭐니 했던 널, 말릴 엄두를 낸 적 없다. 그게 매력이기도 하고. (장점이라고 완전히 인정한 건 아니다.)
처음 너의 집에 인사 간 날, 장모님 말씀이 떠오른다. 너처럼 배려 없는 아이를 데려가 주어 고맙다고.
비가 오면 꼭 먹어야 한다며 몸살이 난 나를 끌고 막걸릿집으로 향하던 너.
본인은 우정에 죽고 우정에 산다며, 남자 사람 친구들과 새벽 내내 웃고 떠들면서. 어쩌다 식사자리에 친구 여동생이 끼어서 나눈 담소에 뒤집어지는 너.(네 표현이 이렇게 잘 맞아떨어질 수가.)
주말은 역시 꿈쩍도 하기 싫다며 백일이 좀 넘자 '오빠가 일산으로 와!'를 습관처럼 달던 너.
서른 살의 나는 딱 그렇게만. 나름의 이유를 찾는 걸 마쳤던 것 같다. 그게 정말 다였다면 장모님도 그런 말씀이 없으셨겠지.
서른넷, 네 남편은 그 이유를 서서히 알아가다, 지금은 알만큼 알게 됐다.
누군가 너와의 연애에서 어려웠던 게 뭐냐고 묻는다면 이거다. '예상외.' 예를 벗어나 날 당황시킨다. 너와의 결혼도 크게 보면 예외다. 적어도 내 인생에선 말이다. 솔직히 결혼하자를 달고만 살았지 정말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늦잠으로 약속 장소에 널 40분째 서게 둔 날. 사실 나는 이별 대처법을 검색하며 달렸다.
오랜 캠퍼스 커플이었던 고무신 후배도, 전에 잠깐 사귀던 누나도. 그런 실수엔 넘어가지 않는 무시무시한 여자들이었으니까. 우리 연애 중 그날은 내가 너와의 끝을 생각한 마지막 날이었다. 늦잠처럼 처음이기도 했고.
턱끝에 찬 숨을 뱉으며 네 앞에 섰다. 역시나 찌푸린 곧은 눈썹. 마음으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내가 알람을 분명.."
핑계는 늘어두고 차이자, 했던 결심이었다. 시선을 땅으로 길게 늘어뜨리는데 네 말이 치고 들어섰다.
"나 아까 저기서 구경하다가 이거 샀다! 네가 늦어서 나 또 샀잖아, 비슷한 거 있는 건데. 짜증 나."
바로 얼굴을 들었다. 예상했던 뾰족한 말이 아니어서. 그새 너는 들고 있던 봉투를 열어 내게 내민다. 립스틱이네. 평소 같으면 이걸 돈 주고 또 샀네 , 했겠지만 의아한 나머지 어버버 했다.
그랬더니 무슨 반응이 그렇냐며 '찾아둔 밥집 이쪽!'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말 이상한 여자다. 너와 사계절을 한 바퀴 돌고 난 후. 그때서야 말해준 적이 있다.
왜 나라고 화나지 않았겠느냐고. 내가 옷을 입고 허둥대던 틈에 보낸 카톡에 답이 없자, 오만가지 불안을 떨었다고 했다.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잠수 이별인가? , 오빠가 나를 버렸구나.
이 말을 듣자마자 손사래부터 칠만큼 말이 안 됐다. 그런데 웃으며 본 네 얼굴은 그러지 못해 바로 웃음을 거두었다.
너는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 반전의, 끝없는 반전의 무얼 가지고 있다. 만나기로 한 훨씬 전부터. 그러니까, 멀리서 바라본 팔로워로서의 넌 그런 불안을 한 번도 가지지 못할 여자 같았다.
일단 네 주변엔 항상 사람이 있다. 네가 날 남자 친구라고 소개하기 전이든 후든 말이다.
결혼식 축가를 부른 신촌 4인방부터, 조금만 다투기라도 하면 (그렇게 심하진 않으니 '부부싸움'이라고 하진 않을게.) 동네 호프집으로 불러내는 너의 21년 지기. 그 재승 씨와 같이 만나는 장모님 친구 아들들까지 해서 일곱.
물론 질투는 크게 안 났다. 한때 너만큼 대학가를 누볐던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 가능한 수준이었으니. 그래도 너의 슬프거나 기쁜 일엔 그 일곱보다 먼저이고 싶었다. 변심만 하지 않으면 됐다.
조금 빠져있는가 싶으면 금방 '나 안 해!' 관두는 네 천성이 두렵기도 했다. 학창 시절 생기부에 <끈기 부족>이 꼬리표처럼 붙었다며 가볍게 해 준 이야기도 기억난다. 얘가 나에게 싫증 느껴버리면 어쩌나. 결혼 전날까지 막연히 걱정했다.
그런데 그건 네 말이 맞았다. 다른 건 작심삼일이어도 사람에게만큼은, 질릴 경지에 오를 수 없이 푹 빠진다는. 막연한 걱정은 부부가 되면서 막연하게 사라졌다.
넌 나뿐만 아니라 일에도 그랬다. 변덕스러운 기질을 타고난 너는, 아침마다 어깨를 톡톡 치는 내식 알람에 번뜩 일어나는 것도. 그렇게 같은 회사로 몇 년째 향하는 것도. 퇴근길 2호선 몇 정거장 위의 신음도. 싫증 내지 않고 있다. 기특하다.
대신 아점을 차려야 할 시각까지 잠들어 있는 것도 흔하다. 오늘처럼 주말 잠도 한결같다. 깨우지 않고 둔다. 어제는 얼마나 우스운 모습이 찍혔을지 폰을 들어 네 인스타그램 스토리를 들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