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의 고민
첫 직장과 작별하며. 작별? 아직 헤어지진 않았지만 '없다면?' 하고 가정해 미리 슬퍼해 보는 것. 이런 걸 하고 있다. 내 브런치는 입사 시점으로부터 멈췄다. 공교로운 걸까? 사실 스스로도 아니라고 단정한다. 그 전후가 누가봐도 달라졌으니.
시간 흐름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웠던 취준 땐 그래도 감성이 축축했다. 지금은 아파트 베란다 같은 삶이다. 날 공기로부터 한 발 떨어져 있으면서, 볕이 따뜻할 때도 있고 따가울 때도 있다. 눈,비가 내리면 철문을 닫으면 그만이다.
그래서인지 메마르다는 표현을 써야만 할 것 같다. 젖으면 철문을 닫고, 어찌 됐든 마르니까. 적극적인 듯 하지만 보장된 선에 그치는 소극적임. 집안에선 가장 바깥쪽으로, 그렇다고 자연은 아닌. 꼭 고층 아파트 베란다 같다.
오랜만에 브런치를 쓰니 주중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말만 써진다. '시간이 정말 많이 흘렀네.' 같은. 얼굴이나 신분을 말도 안 되게 바꾸고 나타난 주인공 엄마가 자식 앞에 N년 만에 나타나 자책하듯 하는 대사답다.
예전에 쓴 (예전이라기에 5년 전이지만) <나의 20년지기>는 25년 지기가 되었고, 아빠의 양주 창고는 미래 사위 대신 고달픈 마음의 퇴근한 내가 비우고 있다.
뭐, 출근하는 건 골치 아픈 일이지만 회사에서 꼭 골치 아픈 일이 있는 건 아니다. 팀장님처럼 좋은 어른도 있고 밖에서 만나는 징그러운 어른도 있다. 맞다, 이걸 꼭 쓰고 싶었는데. 어제 미팅은 정말인지 말도 안 됐다.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그 여자를 징그럽다고 표현하는 건 다름 아닌, 나의 오해에서 온다. 대학생일 적부터 바라왔던 그 모든 집합체. 일명 '커리어 우먼.' 테이블 위 놓인 명품 명함 지갑, 아래 직급 사람이 잔뜩 긴장할 아우라, 그리고 논리 있는 고집. 유능해 보였다.
내 오해는 바로 이거다. 저렇게 되면 무척 좋겠다, 성공한 거야. 그렇게 믿은 오해. 일을 위해 남의 비위를 맞추고 그전엔 꼭 그렇게 할 것을 부하직원에게 타이르고... 그 남이 도착하면 갈아 끼우는 얼굴. ‘잘하실 것 같아서요... 잘 되어야 해요. 그러니 잘 부탁합니다...‘ 일을 위하여만 허용이 되고, 그 밖의 배려는 수고롭다고 여기는. 수고로우면 그냥 안 해버리는. 무례하든 말든 자칭 '일잘러.’ 면 되는. 그 여자에게 멀리서 온 나와의 사담이나 배웅은 수고로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되고 싶었다. 왠지 차도녀 같고, 그게 일 잘하는 건줄 알았다. 당시 남자 친구도 없었는데, 있지도 않은 시어머니가 육아보단 그런 모습을 좋아할 것 같고, 부모님도. 대학 보낸 보람이랄지 느끼겠다, 싶었다.
막상 보니 내가 되게 오해했다. 그려온 프로의 모습이 저런 여자인가. 난 징그럽게 되고 싶었나? 좀 생각했다. 그러다 오늘부터는 아닌 거로, 하며 복귀 택시에 올라탔다. 돌이켜보면 인플루언서 비위를 맞추기 싫어서가 아니라, 진심이 결여된 순간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 같다. 예상보다 큰 규모의 미팅에 허둥대던 나에게 눈 맞추며 웃는 모습에 가식적이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내 일 달성을 위해 호응'하고 싶지 않다랄까. 그냥 고마울 순 있어도. 모르겠다.
한 시간 남짓 본 여자여서 그 일생을 다 알지 못하지만, 결론은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10년 차 이런 강쇠에 비하면 내 경력은 한없이 짧지만, 매년 다양한 어른을 본다. 닮고 싶은 어른, 방금처럼 '저렇게 되진 말아야지.' 몸소 알려주는 어른, ‘어떻게 저러지.' 긍정의 놀라움을 주는 어른. 등등. 나는 대체 어떤 모습이고 싶었을까. 그게 회사원이긴 한 걸까? 작별 시점에 오는 의문은 끝도 없다.
베란다는 가끔 실수로 열어놓은 철문에 눈,비를 척척하게 맞고, 집주인 맨발에 쩍쩍 밟혀도 봐야 하는데. 몇 년을 굳게 닫고 산 철문을 열자니 두렵고, 이대로는 메말라 못 살 걸 안다. 대충 2막이 결정되면 다시 쓰러 와야겠다.
아무래도 모든 작별은 슬픈 거다. 일어나지 않더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