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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리뽀 May 02. 2024

엄마에게 제주를 선물하는 재주

엄마와 2주간 제주 봄 여행을 즐기다.

이 서방! 스위스 잘 다녀오게~ 덕분에 애들이랑 딸 얼굴 많이 보고 있겠네!

장모님~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해요~ 스위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4월 어느 날, 제주 공항에서 오랜만에 만난 장모와 사위는 바톤 터치를 하듯 저렇게만 인사를 나누고 급히 헤어졌다.


우리 엄마의 사위인 나의 남편은 캐리어를 끌고 공항 안으로 들어 가야 했고, 내 남편의 장모님인 우리 엄마는 나와 함께 제주 집으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은 제주로 이사 온 지 두 달만에 2주간 스위스로 여행을 떠났다. (무려 나와 아이들만 제주에 두고 말이다!! ㅋㅋㅋ)


시부모님이 스위스 여행을 가고 싶어 하시던 에, 때마침 아들이 휴직 중이고 하니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하셔서 어찌저찌 이렇게 되었다.


졸지에 2주간 남편 없이 제주에 남게 된 나와, 아빠 없이 지내게 된 아이들. 걱정이 태산 같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친정 엄마께 말씀드리니, 엄마가 남편이 없는 2주간 제주에 와 주신다고 하셨다.


나의 천군만마, 사랑하는 우리 엄마!


혼자 아이들과 지낼 딸 걱정에 한달음에 달려와 주신 엄마를 생각하면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주어진 2주간을 엄마와 제주로 여행을 왔다 생각하고 실컷 돌아다닐 작정이었다.


엄마에게 제주의 아름다운 봄날을 매일 선물해 드리고 싶었달까? 나의 이런 마음이 엄마께도 통했는지, 엄마는 매일매일 감탄하셨고 찐으로 즐거워 하셨다.


“제주도를 몇 번이나 와 봤는데, 이번이 내 인생 최고의 제주였다… 고맙다 딸!”


엄마와 제주에서 함께 보내는 마지막 날, 엄마께 이런 말까지 듣다니! 여태 못한 효도를 한 번에 몰아서 한 느낌에 뿌듯했다.


엄마와의 모든 날들을 빼곡히 서술할 수는 없고… 이번에는 2주간 새롭게 알게 된 엄마의 모습에 대해 기록해 보고자 한다.




1. 엄마는 감정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다.


엄마는 감정에 매우 충실한 분이다. 그게 어린 자식 입장이었을 때는 큰 스트레스로 느껴지기도 했다.


어린 내가 바라본 엄마는 화도 버럭버럭 자주 내셨고, 칭찬도 많이 해 주셨고, 자식의 좋은 일은 누구보다 크게 기뻐 하셨고, 자식의 슬픈 일은 마치 본인이 겪은 듯 눈물을 흘리며 같이 힘들어 하시는 분이었다.


분명 엄마가 공감이나 위로를 잘해 주셔서 좋을 때도 많았지만!


대부분은 엄마의 감정 롤러코스터를 나도 얼떨결에 따라 타게 돼서, 내 감정도 요동치는 느낌을 받은 적이 훨씬 더 많았다. 그럴 때는 일부러 내 감정을 지키기 위해 엄마를 피하기도 했는데, 그게 오해를 만들어 엄마와 싸우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나 역시 엄마를 쏙 빼 닮아, 감정에 매우 충실한 채로 사는 사람이 되었다.


엄마가 낳은 삼남매 중 엄마를 가장 많이 닮은 게 바로 나인데… 그래서 나는 엄마랑 감정적으로 충돌할 우려가 가장 높은 딸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에 엄마와 2주간 지내다 보니 엄마가 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라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딸을 배려하느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한다거나,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지내셨더라면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싶어서 그렇다. 엄마가 이건 이래서 괜찮다, 이건 이래서 별로다, 자신의 마음을 바로 말해 주시는 편이 나았다.


감정에 충실하다 보면 겪게 되는 여러 문제들에 대해서도, 엄마랑 이야기하다 보면 서로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어 좋았다.


'어느 정도 감정을 컨트롤 해야 사는 데에 지장이 없다'는 명제에는 둘 다 적극 찬성하면서도, '근데 우리는 그게 안 되니까 어쩔 수 없지 않나?'로 끝나는 대화의 반복이었긴 하지만^^;


'우리 모녀는 이렇게 감정을 잘 표현하는 것에 특화된 사람인데, 그냥 살던대로 살자!' 이렇게 엄마랑 대동단결 해서 결론을 짓고 나면 마음이 크게 위로 받는 느낌이었다.


감정에 충실한 엄마는, 아이들이 잠든 밤에 둘이 맥주를 마실 때도 종종 눈물을 흘리셨다. 엄마의 눈물을 볼 때마다, 엄마가 많이 약해지셨구나 싶어 마음이 아프기도 했는데...


그래도 언제 울었냐는 듯 금세 눈물을 닦아 내시고는 특유의 긍정 마인드로 다시 무장하는 엄마를 보면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느끼고, 그 감정들을 골고루 분출하시는 엄마가 인간적이라 생각했다.


나도 엄마처럼 늙어 가겠지… 엄마의 얼굴 속에서, 내 몇 십년 후의 얼굴이 비춰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 엄마! 오래오래 지금처럼, 감정에 충실한 아이처럼, 그렇게 살아주셔요 ㅎㅎ 저도 엄마 나이가 됐을 때, 같은 나이대 할머니 중에 가장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으니까요^^


엄마와 함께 걸은, 수많은 제주의 길을 기억할게요...♡




2. 엄마는 올레길을 완주할 정도로 체력이 짱짱하시다.


엄마가 제주에 머물게 된 두 번째 날, 겹벚꽃을 구경하려고 제주시로 넘어 갔다. 꽃 구경을 잘 하고 점심 먹을 곳을 찾다가 조천 바다 근처 식당과 카페까지 들르게 되었다.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초당 옥수수 아이스크림까지 디저트로 먹고 나니 배가 너무 불렀다. 조금 걸으며 소화 좀 시켜야겠다 싶어 살펴 보니, 마침 카페 앞길이 올레길 18코스였다. 엄마와 살살 걸어서 유명한 닭머르 해안까지 갔다.


"엄마, 이게 올레길 표식이야~ 이 표식을 따라서 걸으면 돼."


"올레길 너무 좋네! 엄마도 한 번쯤은 올레길 완주하고 싶다..."


맛보기로 보여드린 18코스가 좋으셨던 엄마는 올레길 완주의 의지를 드러내셨다. 그렇다면... 엄마와 올레길 걷기에 도전해야지!


아이들이 학교에 간 평일, 미세먼지가 유달리 심했던 날! 엄마와 올레길의 시초인 1코스를 함께 걸었다. 말미오름과 알오름에 올라 우도와 성산일출봉이 펼쳐지는 절경을 감상하고, 아기자기한 종달리 마을길을 따라 걷다가 에메랄드빛 종달리 바다가 한없이 펼쳐지는 구간에 이르렀다.


거의 4시간 정도 쉼없이 걸었던 것 같은데, 엄마는 꽤 잘 걸으셨다. 마음은 완주까지 하고 싶었으나,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임박해져서 얼른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고성 오일장이 열리는 날이라, 엄마께 오일장 구경을 시켜 드리려고 성산 쪽으로 다시 갔는데! 어차피 여기까지 온 김에 어제 못 끝낸 1코스 길을 마저 걷기로 했다. 오조포구가 있는 2코스 길도 조금 걷다가 광치기 해변까지 무사히 완주했다.


"올레길 너무 좋다. 내 발로 걸으면서 보니까 속속들이 제주를 알아가는 기분이 들어."


엄마는 그렇게 올레길의 묘미에 푹 빠지셨다.


엄마와 함께 맞이한 첫 주말에는 비 예보가 있었다. 토요일에는 하루종일 비가 내렸고, 일요일에는 오전에만 비가 온다고 해서... 아이들과 올레길 5코스 걷기를 계획해 두고도 망설이던 중이었는데!


아이들이 우비를 입고서 올레길을 걸어보고 싶다고 했다. 과감한 녀석들!!! 그래서 우리는 우중 올레길 걷기에 도전!!!


나와 엄마, 그리고 나의 두 딸들, 이렇게 3대가 함께 올레길 5코스 완주에 성공했다. 엄마는 우리 아이들과 걸으니 더욱 즐겁고 행복했다는 소감을 전해 주셨다.


비가 많이 오던 평일에는 우리 집과 연결된 올레길 4코스도 양쪽 방향으로 산책 삼아 다녀왔고... 비가 그친 평일에는 야심차게 '런던 베이글 제주점'에 찾아 갔다가, 함덕해수욕장까지 이어진 올레길 19코스도 걸었다. 완주는 못 하고 돌아왔지만, 느낌상 3분의 1 정도는 걸었던 것 같다^^


대망의 하이라이트는 올레길 7코스였는데... 이유는 너무 힘들어서...ㅋㅋㅋ


엄마와 함께 한 두 번째 주말은 해가 쨍쨍, 날씨가 좋았다! 첫째 아이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7코스를 걷자고 해서 야심차게 걷기 시작했는데...ㅎㅎㅎ 아이들이 좋아하는 숲길과 돌길보다는 잘 가꿔진 산책로나 아스팔트 길이 많아 좀 더 힘들었다(?)


엄마도 나와 함께 걸은 올레길 중, 가장 별로라고 말씀하실 정도였으니^^; 겨우 밤 8시가 다 되어 우여곡절 끝에 올레길 완주에 성공하고... 파김치가 되어 집에 도착해서 보니, 그 날 3만 5천보를 걸었더라. ㄷㄷㄷ


나보다 연세 있으신 엄마 무릎이나 발 상태가 걱정이 되었는데... 다음날 굉장히 힘들어 하긴 하셨지만, 하루 잘 쉬고 나니까 엄마도 금세 체력을 회복하셨다.


올레길을 세 코스나 완주한 우리 엄마... 연세도 있으신데, 진짜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아직 이렇게나 건강하다는 걸 알 수 있었던 시간.


엄마, 지금처럼 체력 관리 하셔서 다음에 또 올레길 도전합시대이^^


엄마와 걸었던 여러 올레길을 기억할게요..^^




3. 엄마는 미술관 나들이를 좋아하신다.


제주는 의외로 비가 많이 내린다. 엄마가 제주에 머물렀던 많은 날들 중 절반은 비가 내렸던 것 같다. ㅎㅎ 비가 오는 날에는 엄마와 함께 미술관 나들이를 갔다.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 왈종 미술관, 빛의 벙커, 이중섭 미술관, 기당 미술관


모든 곳이 좋았다.


김영갑 두모악 갤러리는 남편과 연애하던 13년 전에 방문했던 곳인데... 그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김영갑 작가님이 사진으로 찍은 제주의 오름은 여전히 멋있었고, 야외 정원은 비 오는 날의 운치를 느낄 수 있어 더욱 좋았다.


왈종 미술관은 작가님 특유의 재치와 아이디어가 듬뿍 들어 간 제주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미술관 옥상에 올라서 내려다 본 섶섬과 서귀포 앞바다가 너무 아름다웠다. 제주에서 만나는 미술관은, 늘 멋진 야외 풍경을 품고 있어 두 배로 볼 것이 넘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빛의 벙커에서는 샤갈의 매혹적인 그림을 음악과 함께 만나볼 수 있었는데, 역시나 야외 정원도 만만치 않게 멋있었다. 왈종 미술관에서 이미 보고 온 이왈종 작가님 그림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 음악과 함께 보니 더욱 귀엽고 천진스러운 그림들이었다.


이중섭 미술관은 남편과 지난 달에 방문했는데, 또 와도 좋았다. 배가 고파 서귀포 바다에서 잡은 게로 끼니를 해결하며, 게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셨다는 이중섭 화백님... 덕분에 이중섭님 그림에서는 수많은 게를 찾아 볼 수 있었다.


엄마와는 이중섭 미술관을 시작으로 이어지는 작가의 산책길도 함께 걸었다. 그 길 위에는 다양한 조각상과 예술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산책길이 너무나 예쁘니 추천합니다^^


마지막으로 엄마와 함께 간 미술관은 기당 미술관! 기당 강구범 선생님께서 서귀포시에 시립 미술관으로 기증했다는 독특한 모양의 미술관인데! 변시지 작가님의 상설 전시가 특히 마음에 와닿았다. 제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외롭게 형상화한 그림들이 많았다.


기당 미술관 내부 형태에 감탄하다가, 아트 라운지로 가 보면! 기가 막힌 한라산 뷰가 펼쳐진다. 아이들이 그림 그리며 놀 수 있는 작은 놀이 공간도 마련돼 있으니, 이곳은 영유아 부모님이 오시면 딱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엄마와 여러 미술관을 다닌 덕분에, 엄마에게 예술적 감성이 가득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도 미술 실력은 젬병이지만, 아름다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꽤나 좋아하는데... 역시 피는 못 속인다는 걸 느낄 수 있었지요 :)


엄마와 함께 간 제주의 미술관들을 기억할게요..^^




엄마와 함께 한 2주가 쏜살 같이 지나고, 예정된 날짜에 스위스 여행을 마친 남편이 돌아왔다. 다시 한 번 사위와 장모는 바톤 터치를 하게 되는데...


기분 탓인가... 두 사람 사이에 이런 대화가 눈으로 오간 것만 같은 기분은...?


'장모님, 2주간 고생 많으셨죠...? 철없는 제 와이프이자, 막무가내 딸내미와 함께 지내느라 정말 고생하셨어요!'


'아니 이서방, 2주가 왜 이렇게 길던지... 다시 한 번 느끼지만 이렇게 부족한 내 딸과 살아 주느라 참말 고생이 많소! 미안하지만 이런 내 딸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우리 이서방 뿐이네... 고맙구먼!'


허허허, 그저 웃지요^^;


엄마! 이번 어버이날 선물은... 딸과 사위 모두 백수(?)인 관계로 ㅎㅎㅎ 미리, 제주의 봄을 선물한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제주에서든, 육지에서든, 우리 또 만나요!!


엄마를 얼만큼 사랑하냐구요? 저기 제주 바다만큼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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