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하지만 그런 이별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오랜만에, 이별을 했다.
우리는 한 모임에서 우연히 만났다.
서로가 처한 상황이 매우 비슷하기도 했고, 무엇보다 서로의 관심사, 추구하는 가치가 매우 잘 통한다는 것을 느꼈다. 우리의 대화는 당장이라도 세상을 바꿀 무언가를 시작해 보고자 하는 열정으로 가득했다.
그렇게 우리는 정말로 두 달간 함께 세상에 없던 무언가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목표는 같았지만, 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있어 의견 차이를 좁히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는 늘 누군가와의 협업을 성공적으로 잘 이끌어간다고 생각했는데, 다른건 몰라도 사람을 대하는 것, 그 사람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은 더 큰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여러 이유로 이를 억지로 지속해나가는 것이 그 친구에게도 나에게도 독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그리고 본업에 지쳐 더이상 내 시간을 여기에 성실히 들여 참여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서고 난 순간,
어렵게 먼저 말을 꺼냈다.
다음 날에야 온 답장. 그 친구도 이것이 워낙 자신에게 컸기에 감정을 추스리는데 시간이 꽤 걸렸다고 한다.
한 마디 한 마디 어렵게 적고, 또 다듬었을 친구의 문장 속에서 나라는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고민한 시간들이 느껴졌다.
그 친구는 내가 묵묵히 자신의 의견을 따르는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생각해보게 되었다고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그제서야 나도 깨달았다. 난 여전히 누군가에 대한 서운함, 그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나의 심정을 솔직하게 전하는 것에 서투르다는 사실도. 이것을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용기, 난 아직 그게 필요했다.
어떻게 보면 실망과 좌절의 감정이 더 컸을 수도 있는데
나를 이해해주는 이런 친구를 만났다는 것에 감사했다.
문득, 지금까지 지나왔던 이별이 떠올랐다.
이별의 상대, 상황은 달랐어도,
내가 정말 사랑한 무언가를 먼저 포기하는 것은 똑같았다.
이전의 이별도 멀어지고 싶은 마음과 함께하고자 하는 마음이 공존했지만,
당시에는 아직 함께하고자 마음이 조금 더 컸기 때문이다.
힘겹게 선언을 한 후 나의 이별통보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주었던,
혹은 상대의 반응이 화살이 되어 도리어 내가 상처를 받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별은 왜 이렇게 아파야만 할까,
원래 이런것일까 하는 생각으로 늘 마무리 지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이별은 조금 달랐다.
그 친구도, 나도 다른 곳에 있겠지만 서로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응원하는 순간이었다.
가위로 잘라내듯 더 이상 얼굴을 마주하지 않을 그런 마음 아픈 이별은 아니기에 참 다행이었다.
내 힘든 상황과 감정을 충분히 존중받고, 앞으로의 걸음을 응원하는 친구의 말이
이별을 통보하고 한없이 나를 자책하던 과거의 나에게도 위로를 건네는 것 같았다.
한용운 시인의 <임의 침묵> 속 한 구절,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를 다시 읊조리며,
여전히 묵직한 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털어버리고 내 시선이 여전히 머무는 이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일을 멈추지 않도록
스스로에게 작은 응원을 보냈다.
많은 생각이 드는
감사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