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동안 낮 최고기온이 영상 10도를 웃도는 겨울 속 봄날 같았다. 추위가 질병 수준인 내겐 덤으로 얻은 선물 같은 날들이었다. 주중에 있을 성탄절에 특별한 계획은 없었지만 설탕가루가 솜사탕으로 부풀려지듯 괜히 덩달아 들떴다.
분주했던 교회 일정을 마쳤고 적당히 다습해서 낮잠이나 책 읽기가 딱 좋은 안온한 오후. 아들이 관사로 출발하기까지 두 시간쯤 남은 오후 4시를 지나고 있었다. 손으로는 안도현 시인의 시집을 들고 머릿속으로는 아들에게 챙겨 보낼 반찬을 궁리하고 있었다.
막 내려놓아 잔열이 남아있는 머그커피잔 옆 전화기가 책상 위에서 드르륵 소리를 냈다. 소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것을 보니 SNS는 아니다. 이 시간에? 그럴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며 조금은 귀찮은 마음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같은 지역에 살고 있는 친정오빠였다. 용건은 주로 통화보다 카톡인데 전화라니 무슨 일일까.
"응, 오빠."
"엄마 발톱 까매진 거 알고 있냐?"
침대 이불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내 몸처럼 축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발톱? 아니, 몰라. 아무 말씀 없었는데."
순간 어머니의 오랜 지병인 당뇨의 합병증세가 전광석화처럼 떠올랐다.
여름에 방문했던 대학병원 내분비내과에서 그동안 관리하던 당화혈색소 수치가 최대치로 올라 혈당조절약을 반 알 더 처방받았었다. 봄 내내 운동을 중단하신 데다 음식조절을 헐렁하게 하신 결과였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적잖이 놀란 것은 어머니도 나도 마찬가지였다. 시무룩해진 어머니 기분을 살필 새도 없이
"엄마, 운동 안 하셨어? 요즘 단 음식 많이 드셨어요? 뭐 드셨어?"
마치 꾸덕꾸덕 말라가는 채반 위 생선을 날름거린 고양이 잡도리 하듯 진료실을 벗어나자마자 잔소리를 쏟아놓았다. 그리고 넉 달 후 10월 하순 방문했을 때는 늘린 반 알의 효능이었는지 쫀쫀한 관리 덕이었는지 올해 최저치를 기록했다. 반 알의 효능일 거라는 판단에 무게가 더 실리면서 이대로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어찌 됐든 다시 반 알을 없앨 만큼 수치를 만들어보자고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그게 불과 두 달 전인데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간의 상황을 오빠에게 얘기했다.
"약을 반 알 늘리긴 했어도 지난번 외래 때 당화혈색소 수치가 1이나 떨어졌는데. 그새 그럴 리가. "
"몰라. 난 그건 모르고 새끼발톱이 까맣게 변색되었어. 발톱 주위 피부도 까맣게 되었고. 당뇨 때문에 발이 괴사 되기 시작한 거지 뭐야."
괴사.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동시에 몸이 오들오들 떨리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 전화기를 귀에 대고 한 손으로는 침대 이불을 잔뜩 둘러썼다.
"발가락에 감각은 있는 거야?"
내 물음에 엄마의 발가락을 누르고 아픈지 묻는 오빠의 말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아득하게 들렸다.
발가락이 괴사 될 정도의 수치는 아닌데 의아해하면서도 평소 발 상처에 각별히 신경 쓰셔야 한다고 늘 어머니께 말씀드렸던 걱정이 결국 현실이 되었구나 싶어서 와락 겁이 났다. 당황스러운 것은 오빠도 마찬가지였는지 나중에는 화인지 짜증인지 구분 안 되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어머니 발가락 혹은 발 전체를 절단해야 하는 상황까지 걱정이 앞서나가고 있었다.
직장 동료의 부친께서 발뒤꿈치 갈라짐으로 시작된 상처로 무릎 아래까지 다리를 절단하신 일이 있었다. 회복 과정에서 패혈증으로 위중한 상태까지 이르렀다가 회복하신 일이며 다시 한쪽마저도 상처로 괴사가 시작되어서 오랜 치료 끝에 간신히 절단은 피한 일이 최근이었다.
정신이 아찔했다. 어머니의 성정은 그런 험한 상황이 오게 되면 지레 몸져누우시고 이겨내기 힘들 거라는 게 자명했다.
남편이 소천하기 하루 전 대학병원 외래 대기실에 앉아 있을 때의 상황이 순식간에 떠올랐다. 대학병원에 남편보다 아픈 이는 없는 듯 절망적이었다. 환자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무던히 이를 앙다물었다. " 코드블루 "를 외치는 안내방송이 들릴 땐 귀를 틀어막고 얼른 주저앉아야 했다. 눈가가 짓무를 만큼 소리 없는 통곡의 날들이었다. 남편이 떠나면서 내겐 대학병원 트라우마가 남겨졌다.
남편이 소천한 이후 석 달만에 친정아버지께서 일주일 간격으로 두 번이나 구급차에 실려 응급실행을 하셨는데 그때도 너무 무서웠지만 보호자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 댁이든 연로하신 부모님의 돌발상황은 지척에 살고 있는 자식 몫이 되기 마련이다.
그동안 어머니 병원행은 내 전담이었지만 이번엔 달랐다.
"오빠, 나 혼자 감당이 어려워. 혼자서는 병원 못 가겠어."
"내가 내일 모시고 갈 거라니까."
오빠의 말은 목재를 다듬는 사포면처럼 거칠었다. 오빠에게만 맡겨 둘 수도 없는 일이다. 상황을 회피하려는 게 아니라 혼자 감당이 어려우니 동행을 원한 것이다.
우리 4남매 단톡방에 어머니의 상황이 올려졌고 톡방이 요란했지만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무섭기만 했다. 남편 때 일들처럼 그렇게.
일단 피부과를 시작으로 1차 병원에서 소견서를 받아 대학병원으로 가자고 오빠와 결정했다. 그런데 다시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나는 바로 대학병원 내분비내과로 갔으면 좋겠는디."
지금 상태는 내분비내과가 아니라 다른 과에서 진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씀드렸으나 수긍하시지 않았다. 어머니의 요구를 내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꼭 담당주치의 진료라야 미더운 것 같았다. 다시 어머니를 설득했다.
"엄마, 내일 내분비내과 유**교수님 진료가 있는지 먼저 알아봐야 하고 예약을 안 했으니 예약도 해야 하고요. 좀 기다려봐요. 알아볼게요."
통화를 하면서 대학병원 홈페이지를 열어 담당 교수님 진료일정을 파악했다.
"내일은 오전 진료가 없어. 그러니 오전에 일단 가까운 1차 병원부터 가고 오후에 대학병원으로 가시게요."
어머니 발가락으로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수선해지자 아들은 저녁 식사도 거르고 짐을 싸서 관사로 돌아갔다.
11월 말 김장 준비하면서도 어머니 맨 발을 보지 못했다. 발가락이 대체 언제부터 그랬었나. 잘 살피지 못한 나 자신에게 화살을 쏘았다. 최근 친정엄마와의 일상을 빛의 속도로 되돌려봤다. 열흘 전쯤 바쁜 중에 짬을 내서 친구분 댁에 모셔다 드렸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이 어머니를 뵌 가장 최근이었다. 그때라도 알았더라면.
김장김치 한 통을 친구분께서 주시겠다니 그걸 가지러 가야 한다고 전화가 왔다. 어머니 부탁은 '미리'라는 것은 없고 '지금 당장'이다. 속전속결 좋아하시는 성정과 오랜 습관을 바꾸기는 어려웠다. 기한이 촉박한 일 마무리를 막 시작하려는 찰나에 온 전화였다. 잠시 망설였지만 연로하신 어머니께서 대중교통 이용하시려면 힘드실 테니 모시러 가겠다고 전화를 끊었다. 재빨리 움직이면 1시간 내로 다녀올 수 있으려나 신발을 꿰면서 동시에 외투에 팔을 넣고 현관문을 나섰다. 어머니는 가신 김에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실 계획이었다. 친구분 댁에 내려드리면 끝날 줄 알았다.
친구분 댁 근처 마트에 들렀다. 뭐든 넘치는 집이라 귀한 게 없을 테지만 적당한 걸로 골라오라고 하셨다. 로열과 귤 상자에 샤인머스캣 상자를 얹었다. 초인종을 눌렀다. 되돌아 바로 나오려고 차 시동도 끄지 않았다. 대문이 열리고 넓은 마당 건너 높은 계단 위 현관문 앞 노부인께서 들어오라고 손짓을 하셨다. 현관 안쪽에 과일상자를 내려놓고 돌아서려니 어머니께서 김치통을 가지러 함께 안으로 들어가자 하셨다. 당황스러웠지만 눈빛으로만 어머니께 말을 건넸다.
"김치통을? 내가 갖다 놓아야 하는 거였어요? 지금 바쁜데."
설상가상 노부인은 김치통은 내주시지 않고 생강차부터 권하셨다.
"내가 직접 만든 거야. 따끈하게 마셔봐. 우리 집이 워낙 넓어서 손 갈 곳이 많은데 몸이 예전 같지 않으니 집을 이 모양으로 어지럽혀 놨어. 우리 작은 딸이 수원에 사는데 한 번씩 내려와서 집을 치워주고 가. "
이에 어머니가 말씀을 받아서
"이 집 두 사위가 모두 의사랴. 저 벽에 그림 좀 봐라. 내가 말한 그 그림이여. 딸이 그린 거라는디 기가 맥히지. 얼매나 솜씨가 좋은지 몰라. 미술을 했디야."
노부인의 두 따님은 내 초, 중학교 선후배다. 외모에 민감해지는 그 시절 동년배뿐 아니라 선후배들 사이에서도 알만한 인물이었다. 뽀얀 피부며 통통한 볼살이 복숭아 같고 긴 갈래머리로 땋아 내린 정갈한 차림새는 누가 봐도 있는 집 귀한 딸이라는 게 표 나는 자매였다. 흡사 가나초콜릿 광고 속 이미연배우 같은 외모였다.
그날따라 맨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입던 옷차림에 급히 외투만 끼고 여름 크록스를 질질 끌고 나온 내 모습이 추레했다. 무슨 추임새라도 꺼내 예전부터 주조장을 운영하던 지역 유지 대단한 댁인걸 인정해드려야 했는데 멍청하게 서서 어설픈 웃음만 지었다.
마음은 급했지만 내 주신 생강차 한 잔을 식탁 옆에 서서 호호 불어 급히 마시고 주춤주춤 서성였다. 아직 준비가 안 되었으니 소파에 앉아 기다리라고 하셨다. 김치냉장고에서 김치통 꺼내시는 게 뭐가 그리 오래 걸리겠나 싶어 다용도실로 따라 들어갔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김치냉장고가 아닌 냉동고 문을 열어 뒤적뒤적, 온갖 것들을 다 꺼내셨다.
"이건 우리 사위가 일본여행 다녀오면서..."
아뿔싸. 그 뒤로 노부인의 말씀과 손은 느릿하게 계속 이어졌다.
챙겨주시겠다는 것들을 꺼내시는 대로 나는 차에 나르고 그러는 동안 노부인 댁에서 한 시간 가까이 체류하고 말았다. 내 살림이 아니니 직접 나설 수도, 채근할 수도 없는 일. 게다가 어머니는 그 댁에서 저녁까지 시간을 보내시겠다고 챙겨주신 것들을 모두 어머니댁 냉장고에 정리해서 넣어두고 가라고 하셨다. 노부인께 인사를 전한 뒤 출발했다. 막 면소재지를 벗어나려는데 놓친 것이 있다고 되돌아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시간이 안 되어 되돌아갈 수 없다고 하자 배추 세 통이라 저녁에 무거워서 못 들고 간다고 하셨다. '김장도 끝났는데 배추를 뭐 하시려고.' 지금은 시간이 안되니 택시를 타시라 말씀드렸다.
"그깟 배추 세 통에 택시비가 몇 곱절인디."
하시는 말씀에 다시 차를 돌렸다. 짐을 어머니 냉장고에 분류해서 채워 넣고 돌아왔다.
결국 계획했던 급한 일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 일 뒤로 어머니도 나도 열흘 가까이 전화를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미안해서 그러셨을 테고 나는 당분간 친정일에 손을 놓고 싶은 마음에서였다. 거기엔 그 댁 따님들과 내 처지가 너무도 달라서 거기서 비롯된, 의도치 않은 불효로 몹시 불편했던 내 마음이 쓿은쌀 속 뉘처럼 섞여 있었다.
그게 가장 최근 어머니를 뵌 날이었고 그날도 발가락, 발톱에 대해서 보고 들은 바가 없었다.
본문 내용과 관련,
많은 분들께 걱정을 드렸어요ㅠ
한 마음으로 기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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