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일회용 컵은 불편하지만 나의 맥주캔은 괜찮아.
합리화 쩌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겠다. 쓰레기 문제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맥주 정도는 가볍게 끊어야 할까? 누구나 약점이 있듯이 내게도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오히려 서로의 이런 약점들을 드러내고 이야기할 때 정말 내가 포기할 수 있는 영역의 쓰레기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맥주는 포기할 수 없으니까 다른 포기할 수 있는 영역의 쓰레기는 더욱더 열심히 줄이도록 할게! 하는 식으로 말이다. 또 사람은 가끔 변하기도 하니까 나도 언젠가는 맥주를 끊을 수 있을지 누가 아나.
나는 책, 커피, 맥주.
책을 쓰레기라고 할 수 있을까. 한 번 산 것은 되팔거나 기증할지언정 버리지 않을 것이기에 쓰레기라고 부르기는 애매한 면이 있지만 내가 집안 곳곳에 쌓아두고 있는 이 많은 책들이 대부분 1회용임에는 틀림없다. 고백하자면 미사용도 수없이 많다. 그저 책을 모으는 수집광은 아니다. 언젠간 읽을 것이다. 다만 읽고 싶은 것이 읽을 시간을 언제나 초월할 뿐. 수많은 경험을 통해 내가 사야 할 책과 사지 말아야 할 책을 구분하는 정도의 기술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작은 위안이다.
커피의 환경영향은 일회용 컵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다. 원두가 자라는 지역의 환경파괴와 정당하지 않은 임금 문제, 물 사용이 많은 것. 그러나 나는 커피는 마셔야 하기에 그저 내 눈앞에 쓰레기가 없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집에서는 원두를 직접 로스팅하는 카페에 가서 사 와서 천 필터에 내려 먹는다. 밖에서는 텀블러를 쓴다. 그러나 나만 그러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거대한 커피 문화에 함께하고 있는 한, 커피가 발생시키는 그 많은 일회용 컵에서 자유롭기는 힘들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나를 만나는 자리에서 사용된 일회용 컵에 대한 지분이 느껴진달까.
맥주는 쓰레기가 아니라 건강 때문에라도 끊고 싶지만 쉽게 끊을 수 없는 애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낮에 커피가 있어 산다면 밤에는 맥주가 있어 산다. 치킨을 먹다 보니 맥주가 당기는 것이 아니라 맥주를 먹기 위해 치킨을 먹는 격이다. (채식 지향하고 있어 치킨을 잘 먹지는 않는데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물건 이야기'를 읽어보면 알루미늄을 생산하는데 독성물질이 나와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해를 끼친다는 내용이 있다. 환경의 문제가 돌고 돌아 '내가 나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남을 죽이는' 문제가 될 때 그것은 '정의' 혹은 '윤리'의 문제가 된다. 그럼에도 또 다른 자아가 '다른 건 열심히 하니까' 혹은 '알루미늄은 재활용되니까'라고 유혹하면 그만 캔을 따곤 한다.
옷 같은 건 거의 안 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고, 나가서 사 먹을지언정 배달은 안 한다는 내가 ‘패스트 패션’이나 ‘배달 문화’에는 불만을 표시하면서 내가 동조하고 있는 ‘커피’나 ‘음주’ 문화에는 너무 친절한 것 아닐까 싶다. 내가 아니라고 해서 너무 쉽게 누군가를 비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누가 누군가의 삶을 재단할 수 없겠지만 삶의 방식이 변화하면서 각 개인이 ‘포기할 수 있는 부분’ 이 더 많아진다면 좋겠다.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비물질적인 것이 사람들에게 좀 더 의미 있게 되고 사람들 간에도 그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많아지면 좋을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마지막까지 포기할 수 없는 쓰레기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