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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송어 Mar 12. 2020

서른한 살, 난생처음 가출했다.

나를 가장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 나의 이야기. 

가출했다. 

물론 어머니 아버지에게 친구네 집에서 자겠노라 문자를 남겼다. 

부모님의 연락에는 꼬박꼬박 답도 했다. 

부모님께 화가 나서 가출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과 싸웠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가는 그 상처를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남자 친구네 집으로 도망쳤다. 


*

20대 중반, 아빠의 갱년기와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

아빠는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나쁜 사람'이라는 칭호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워낙 그 시기에는 그야말로 '발작적'으로 부모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말들을 해대던 시기였으므로 아무런 타격도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경지에 다다르기도 했다. 

*

그런데도 가출이란 것을 해본 적이 없던 내가 단지 동생과 싸우고 가출을 한 이유는

이것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소한 오해로 발생된 동생과의 작은 말싸움은 늘 그렇듯 나의 초인적인 인내심과 배려로 일단락되는 듯싶었다. 

나는 절대 내 동생에게는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고

아무리 동생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더라도 이성적으로 받아들이고,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한 번은 동생의 일방적인 한풀이를 지켜보던 엄마는 화내지 않고 차근차근 이야기 들어주는 나를 보고 혀를 내두르며 '너 정말 대단하다'라고 치하하기도 했다. 

*

그런데 이번 싸움은 달랐다. 최대한 이성적이고자 하는 내게 동생은 가식적이라고 했다. 꼰대처럼 굴지 말라는 듯이 얘기했다. 

나의 인내심의 끈이 끊어졌다. 

나의 배려와 신중한 단어 선택은 그 아이의 입장에서 '인격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오만함'으로 비쳤다고 했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바로 남자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도저히 집으로 가서 부모님께 이 상황을 설명할 자신도 없었거니와

동생을 만날 자신이 없었다. 

더 이상 상처를 받는다면, 당장 내일을 살아낼 자신이 없었다. 


십 년 전에 나는 아빠가 정말 화가 났더라도 아빠의 눈치를 보며 그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아빠의 화가 풀리게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아빠가 나에게 사과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말이다.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나는, 정말 내 마음이 다치는 것을 걱정하여 '피신' 했다. 

유교걸. 조선의 장녀. 이송어에게는 특단의 조치였다.

엄마 아빠가 속상할 것이고, 동생이 놀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뭐?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고 내 마음이 다치는 것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는다. 

아빠의 기세가 약해져서 나에게 화풀이하는 일이 더 이상 벌어지지 않자, 

이제는 혈기가 왕성해진 남동생이 그 역할을 이어받은 듯 

나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화풀이 대상으로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다. 


한 시간 정도 똑같은 말들만 되풀이하다가 

나를 단지 화풀이 대상으로 여기는 것은 아니냐는 내 질문에 

동생은 자신이 지금 그런 기분인지도 모르겠다고 사과했다. 


사과는 항상 쉽다. 

아빠도 항상 하루를 넘기지 않고 사과를 했다. 내일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를지언정. 


*

송어야. 정신 차려. 

그냥 네가 완벽한 가정의 이데아를 지키고 싶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이다. 


*

나는 남자 친구의 집으로 가는 길에 

곧 결혼하는 친구에게 부케를 내가 받겠노라고 했고, 예식장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가부장제를 피해 가부장제로 편입하는 것이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알고 있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고 믿었던 사람들이 나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과

단시 시부모란 이름으로 묶이는 사람들이 상처를 입히는 것. 어떤 것이 더 아플까? 

나는 당연히 전자라고 생각한다. 아니 전자다. 


*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무슨 일이냐고 했고, 동생이랑 싸우고 잘 해결했지만 내 마음에 상처가 너무 크다고 했다. 외로웠다. 소리 죽여 우는 내 목소리에 방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는 남자 친구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엄마는 한숨만 쉬었다. 엄마의 한숨은 나를 향한 동정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단지 남자 친구 집으로 외박을 하러 간, 철없는 딸에 대한 한탄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빠가 날 세상에서 제일 못된 사람이라고 칭한 것이 

나에게 아무런 상처가 되지 않아 당황하며 정말 아무렇지 않게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때. 


엄마가 걱정이 돼서 따라와서는 위로로 하신 첫마디가 그거였다. 

"네가 그렇게 말해서 아빠 기분이 나쁠 수 있었지" 

엄마의 의도는 그거다. 생각하고 한 말이 아니고 감정적으로 격양돼서 내뱉은 말이니 신경 쓰지 말라고. 


하지만 그걸 이해하기에 너무 어렸던 나는, 그때부터 울기 시작했다. 거의 한 시간을. 

슬픔이 아닌, 오롯한 자기 연민의 감정으로. 

이 집안에서 아무도 내 편이 없다는 외로움으로. 


*


나는 우리 가족을 사랑한다. 

아마 그들도 나를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사랑에는 정말 다양한 형태가 있다는 것을 30년을 살면서 배웠다. 


나는 항상 애정을 갈구하고 허덕였다. 

내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화가 나있는 상태를 버티지 못해서 

내게 용서를 빌기도 전에 용서했다. 





*

간밤에 동생이 긴 사과의 문자를 남겼다. 늘상 그렇듯 내가 사과를 했기 때문에 하는 그런 사과가 아니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사과하지 않았다. 


자신이 너무 유치하게 행동했다고, 

용서를 바라지는 않겠지만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 아이의 사과 편지는 나의 것을 많이 닮아 있었다. 

"좋은 시간 보내고, 내일 보자."

사랑하는 가족이 할 만한 말로 끝을 맺었다. 


*

나는 아직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를 인격적으로 모독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능숙하게 대처할 수 있더라도

먼저 사과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미숙하기 그지없다. 


나는 집에 가는 일이 아직도 두려워 

오늘 저녁에도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내일도. 

내일모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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