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되기 전, 한 나라의 왕자였던 고타마 싯타르타는 집안의 강요로 아내를 맞게되고
당연한 수순으로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그는 아이에게 라훌라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라훌라. 고뇌. 장애물. 뭐 그런 뜻이었다고 기억한다.
결혼 한 지 수년이 지나 사람들이 내게 안부차
아기는 아직이야? 라고 물어볼 때마다
아마 생기면 라훌라가 되지 않겠어요. 라고 속으로 대답했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참 쉽게들 말한다, 라는 감상과 함께
저 사람의 인생은 얼마나 편안하고 편협한가 생각하며
그런 질문을 함부로 하지 않는 내 스스로에 대해
약간의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내 사정을 알던 사람 하나가
아이가 있으면 얼마나 좋은지를 역설하면서
그렇게 엄마를 위해서, 라는 단서를 달아놓으면 나중에는 엄마를 원망하게 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그 말을 해 준 것은
엄마의 중풍약을 구하기 위해 중국 국경을 넘다가 인신매매를 당한 새터민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팔려간 집에서 아이를 하나 낳은 사람이었는데
그 아이를 결국엔 사랑해버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나는 나에 대한 지독한 연민이 있지만
그래도 나보다 더 힘든 경험을 한 사람을 알아볼 정도의 이지는 가지고 있었다.
정말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결혼 전 부터 생각했던 산전 검사를 했다.
집 앞에 있는 오래된 건물에서
오래된 의사 선생님이 한결같이 계시는 그런 산부인과 였는데.
오래 전 누군가에게 진단하던 버릇대로
새로 생긴 세련된 단어들을 사용하지 못하고 내게
"6개월안에 자연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불임" 이라고 했다.
단어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했다.
난임, 그다지 놀랍지 않다.
하지만 불임. 그것은 조금 놀랍다.
나는 분명 아기가 생기면 태명은 라훌라라고 정해 놓았음에도
막상 만료 기간이 정해지니
유통기한이 임박한 재료들을 모아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 얼마간의 유예를 늘리고자 하는 그런 마음이 되었다.
외할머니의 첫 아기인 나의 엄마는 결혼식을 기점으로 1년이 채 되지 않은채 태어났고
엄마의 첫 아기인 나 역시도 결혼식을 기점으로 1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태어났다.
허니문 베이비.
나의 모계가 얼마나 임신을 빨리 잘 하는지에 대한 이해와
그에 따른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6개월의 유예가 생기고서는 하느님의 뜻에 맡기기로 하고 피임을 중단했는데
생각보다 생기지 않았다.
그들이 끽해야 20대 후반이고,
나는 거의 30대 후반임을 간과한 탓일까.
아기를 언제 낳아서 키우냐
엄마는 어쩌냐
양가의 도움도 없이 독박 육아를 해야하는데 굳이 내가 내 인생의 그런 고됨을 또 선택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과는 다르게 또
남들은 다 하는 임신을 나는 못하게 되느냐,
라는 걱정이 몰려왔다.
세지 않으려고 했던 6개월이 훌쩍 지난 어느날
더이상 모르는 척 하는게 무리인 어느날이었다.
육아휴직과 다양한 복지들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남편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나의 처분만을 바라던 그의 뒤통수는 결국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이 너무 힘드니 억지로 만들지는 말자" 라는 말을 했고
모든 돈줄을 나의 고향에 두고 남편의 고향에 빈 주머니로 따라온 나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난임병원을 진료조차 완전히 포기하고 며칠이었다.
그렇게 규칙적인 월경이 떄가 되어도 시작하지 않았다.
몸은 당장이라도 월경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소리를 쳤는데,
시작을 하지 않았다.
술상을 앞에 두고,
혹시 모르니 한 번만 해보자고
임신테스트기를 꺼내들었다.
밀물처럼, 썰물처럼 흘러가 한 줄이 되어야 했던 빨간 줄은
방파제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더니 기어이 두 줄을 만들어냈다.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 날 처음 가졌을 때 무슨생각했어?"
"어떡하지? 라고 생각했었어. 너무 놀라서."
이 이야기는 너무 멋이 없고 임신의 결과물인 당사자로서 너무 서운했다.
unplanded kid.
계획에 없던 아이인 나는 그래서 아마 계획된 아이인 동생보다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인가보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나는 꼭 내 아기를 기쁘게 맞아줘야겠다고
어린 시절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더 별로였다.
주말 동안 몇 번이나 상황을 부정하다가, 기뻐하다가
월요일에 문이 열리기도 전에 병원을 찾아갔다.
"아무리 월경이 규칙적이라지만,
이렇게 빨리는 아기집이 안보일 수도 있어요.
그 경우에는 혈액검사를 하셔야해요."
아이는 효자인지. 아기집을 바로 보여주었다.
하지만 정말 집만 있는 것이지 아기가 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세포. 정말 세포 상태였다.
그런데도 나는 걷는 것도, 돌아 눕는 것도 괜시리 조심하게 되었다.
12주 까지는 자연유산율이 높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별다른 관심이나 애정을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어차피 아직은 세포인데 뭐.
그런 말을 계속 해가며.
내게 행운이 올리가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어렵게 얻고
쉽게 잃는 내가
아이를 쉽게 얻고 지킬 수 있을리가 없다고.
남들이 다 평범하게 누리는 모든 것들이 나에게 언제 한 번 허락된 적이 있었느냐고.
그래서. 첫 심장 박동을 들었을 때는
아무 것도 없는 빈 집에
어느새 들어와서 심장 까지 만들어 놓은 것을 알아챘을 때는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내가 정말 아무런 관심도 사랑도 주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잘 크고 있는 그 조그만(정말 1센치도 되지 않는) 것이 내지르는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는
눈물이 흘렀다.
내가 애쓰거나, 용쓰지 않아도
알아서 해낸다는 것이 무엇보다 감사했다.
내 손이 닿지 않아도 된다는 어떤 것이
내 뱃 속에 움트고 있다는 것이 한없이 감사하고 대견했다.
어쩌면 이 아이를 사랑할지도 몰라.
아니.
나는 사랑하고 있었다.
내 안에 뿌리 내리고
내가 먹는 모든 영양분을 앗아간다 하더라고
숨쉬는 것. 걷는 것. 모든 것들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게 하더라도
내가 제 기능을 못하게 하고 있더라도.
네가 내게 와서 숨쉰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너를 사랑할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엄마가 되기 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도 아이가 먼저 내게 손 내밀어줬다.
네가 먼저 내 아이가 되어 주어서,
나는 이제야 비로소 너의 엄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