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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May 27. 2020

당장 내일 어디든 떠날 수 있다면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어제는 어쩐 일인지 파나마답지 않게 초저녁에 비가 꽤 오래 내렸어. 남편은 낮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칭얼거리는 시호를 안고 아파트 입구에 내려갔지. 아파트 입구에 서서(국가에서 정해둔 외출 가능 시간대가 아니라서 더 이상 나가진 못했어) 시호를 안고 비를 구경했어. 저녁에 내리는 비라 바람도 덥지 않았고 시호는 무려 석 달 만의 외출(이라기엔 너무 아파트 입구지만) 좋았는지 얌전히 내 품에 안겨 지나다니는 몇 안 되는 자동차들을 구경했어. 빗물과 자동차 타이어가 뒤엉켜 내는 소음들이 짜릿하게 들리더라. 나도 참 오랜만에 나간 건데(마트라도 다녀오면 여기저기 알코올을 뿌려대고 샤워를 해야 하는 과정들이 번거로워서 요샌 마트도 잘 안 가려고 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흠뻑 젖은 거리가 어딘가 쓸쓸하고 외딴 기분이 들게 해서 기분이 묘했어. 


요즘 넌 소설 위주로 읽고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에세이를 전혀 안 읽고 있을 줄이야..! 삶은 '밸런스 게임'이라더니 이렇게 밸런스 안 맞추기 있냐? 나도 생선 작가의 책이 몇 장 남지 않았는데 다 읽고 나면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를 읽으려고 해. 소설은 남의 인생을 가까이서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좋거든. 이렇게 말하니까 관음증 환자 같기도 하네. 그나저나 여행 에세이를 읽고 나니 왜 이렇게 여행이 가고 싶은 건지... 내가 쓰는 다이어리 중 5년 동안 주어진 질문지에 답을 쓰는 다이어리가 있거든. 거기에 어제 날짜의 질문이 "당장 내일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어디로 여행을 떠나고 싶은가?"였어. 넌 어디로 가고 싶니? 나는 이런 판타지적인 질문에도 현실적으로 "과테말라"라고 썼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요즘 나는 한국이나 과테말라에 가고 싶거든. 이유는 여기와는 다른 시원한 기후를 느끼고 싶고, 또 여기에 없는 한식 먹으려고... 그리고 보고 싶은 가족과 친구들도 만나고 말이야. 근데 현실적으로 시호랑 같이 가야 하니까 오래 걸리는 한국보다는 두 시간이면 도착하는 과테말라를 선택해서 쓴 거야. 만약 당장 내일 내가 과테말라에 가게 된다면 나는 다양한 한식당이 있는 그곳에서 여기선 먹을 수 없는 회나 족발, 곱창 위주로 먹고 다니면서 내가 눈여겨 봐 둔 여행지도 2박 3일쯤 다녀올 거야. 그곳에 사는 임산부 친구에게 이제 나는 필요 없는 육아용품들도 바리바리 챙겨가서 나눠주고 싶어. 아! 그리고 시어머니 생신 선물로 사둔 색이 고운 스카프와 홍삼도 전해드리고 싶고. 선물을 준비해뒀는데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어머님이 파나마로 오시는 일정이 취소됐거든. 갇혀 지내기만 하는 요즘의 나도 모든 생각의 끝엔 여행이 있더라. 나의 여행에는 '아기와 함께 갈 수 있는 곳인가'라는 조건이 붙어버렸지만, 그래서 캐리어 하나쯤은 아기 짐으로 가득 찰 지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여행은 여전히 날 설레게 하는 일이기에 내 안에서 들끓는 이 열망을 모른 체할 수가 없어. 다시 여행을 할 수 있을 그날까지 난 머리에 헤어 에센스를 바르며 이 시기를 묵묵히 견뎌내야겠어. 웬 헤어 에센스냐고? 나는 외출할 일도 없는데 샴푸 후에 머리에 에센스를 챙겨 바를 때, 나를 아껴주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아지더라. 


아참!  내 김치의 맛은 다음 편지쯤 되어서나 알릴 수 있을 것 같아. 일단 배추김치는 너무 짜서 망했다는 소식을 먼저 전해둘게. 간을 보지 않고 레시피에 쓰여있는 대로 액젓을 쏟아부었더니 너무 짜더라고... 그나마 깍두기와 백김치에 희망을 걸고 있어. 오늘은 깍두기를 맛보기 위해서 경상도식 얼큰 뭇국을 끓여먹을 거야. 뭇국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소기기와 무 외에도 우거지와 숙주까지 넣어 얼큰하게 간을 해서 팔팔 끓인 거라 뭇국보다는 장터국밥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어. 깍두기의 쓸모는 깍두기가 깍두기가 되기 전부터, 말하자면 무의 형태로 슈퍼에 진열돼있을 때부터!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어. 그래서 일부러 국밥집 스타일로 무도 조금 큼지막하게 서걱서걱 잘라서 담갔지. 국밥은 잘 익은 깍두기 없인 반쪽짜리잖니?! 부디 내가 담근 깍두기가 맛있게 익어서 오늘 나에게 온전한 국밥을 허락해주길!


요즘 한국의 날씨가 퍽 더워진 것 같던데, 시원한 김치말이 국수 한 그릇 어떠니? 아! 물론 고기 먼저 구워 먹고 후식으로. 아... 나는 아무래도 김치말이 국수 먹고 싶어서 물김치도 담가야할 것 같아!!!!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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