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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채리 Aug 31. 2020

희망과 태양에는 임자가 없다

파나마에서 연남동으로

도연에게.


쾌락 후에 오는 '두통과 울렁거림'..! 이미 지나버린 숙취인데도 글자만 봐도 다시 괴롭다. 이 숙취의 증상은 입덧이랑 정말 비슷해. 엊그제 숙취에 시달리며 입덧을 심하게 겪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어떤 사람은 만삭 때까지도 입덧을 했다지 뭐니? 사실 나에게도 입덧이 와서 살이 좀 빠지려나.. 기대했는데 먹덧(먹어야 속이 편안해지는 입덧)이 웬 말이야. 너무 가혹하다 가혹해. 내가 임신 두 달만에 6kg이나 쪄가지고 미리 정해둔 드레스를 최종 가봉하러 가서 임밍아웃을 하며 다른 드레스로 바꿀 줄은 상상도 못 하던 일이다. 심지어 인사 돌면서 입으려고 산 원피스도 말이야, 그 원피스를 살 때만 해도 결혼한다고 다이어트를 졸라 열심히 할 때여가지고 아주 마음에 들던 핏이었는데... 결혼식 이틀 전에 입어보니 지퍼가 안 올라가서 그냥 한복으로 할 걸.. 후회하며 안에다가 코르셋처럼 조여주는 압박 속옷까지 입고 지퍼를 올렸다구... 어휴, 결혼식날 얘기하지 말아야지. 결혼식 내내 오열하던 오빠와 임신 초기로 피곤한 몸, 살찌고 힐도 못 신어서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 여러모로 나는 내 결혼식이 참 싫었다.ㅋㅋㅋㅋㅋㅋㅋㅋ너는 결혼식 안 할 거라고 했지? 소소하게 흰 원피스 입고 혼인신고하러 가는 그런 정도의 세리머니가 너에게 참 잘 어울릴 것 같아. 


그나저나 너는 MBTI유형을 다 외우는 게 너무 놀랍다. 나는 내 결과를 누가 물어보면 매번 캡처해둔 걸 찾아서 대답하거든. '사교적인 외교관' 유형이 나왔다는 것 말고는 당최 기억이 나지 않는 알파벳들의 조합.... 근데 나는 그 결과지를 보고서 "나 이런 사람 아닌데?" 하고 다시 했는데 정확하게 똑같은 결과가 나왔어. 난 그런 사람인가 봐. MBTI가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었네. 나는 어떤 사람인지 36년을 살았는데도 아직 나를 잘 모르겠다. 가끔씩 튀어 오르는 나의 낯선 모습에 스스로 놀랄 때가 있어.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면서. 요즘은 내가 생각보다 육아가 잘 맞는 사람인가? 하는 생각에 종종 놀라곤 해. 아, 근데 혹시 너... 별자리는 안 믿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나는 별자리에 대해선 전혀 모르거든. 말이 나온 김에 오늘 너에게 편지를 부친 후에 내 별자리에 대해서 검색을 좀 해봐야겠다. 


근데 나 그거 너무 공감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제일 못되게 구는 것, 나도 그랬는데! 나는 특히 가족한테 그랬거든. 남편도 가족이긴 한데 엄마처럼 다 받아주진 않더라..?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리 엄마는 다 받아주고, 내가 짜증 내도 나 사랑해줬는데... 남편은 내가 짜증내면 같이 화내더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에 어떤 티브이 프로그램에서 故김자옥 님한테 부부가 사이가 좋은 비결을 물었더니, 너무 밉고 화가 나서 남편 등짝을 한 대 후려치고 싶을 때 '사랑해'라고 말했대. 나도 그 비법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오빠랑 사이좋은 부부가 되어야겠어!


오빠는 자유 데이에 11시 넘어가니까 너무 졸려서 혼자 먼저 잤대. 새벽에 잠깐 깼는데 거실엔 빈 소주병들이 나뒹굴고 친구들은 코러스까지 넣어가며 노래 부르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하더라. 그러나 본인은 그냥 잤다고.... 시호가 우리로 하여금 꽤 괜찮은 생활패턴을 갖게끔 만들어주었지 뭐니. 

그나저나 남친분 입원하신 병원은 밥이 좀 괜찮니? 아주 중요한 요건인데 말이야. 우리 엄마는 여기저기 아픈 곳과 지병들이 있어서 병원에 자주 입원하는데, 엄마랑 통화할 때 내가 엄마한테 제일 자주 묻는 게 그거거든. "엄마, 그 병원은 밥 잘 나와??" 밑반찬을 다양하게 해 먹을 수 없는 파나마에서.. 병원밥을 상상했더니 다양한 반찬들이 너무 먹고 싶어 진다. 조만간 장조림과 무말랭이를 오빠에게 오더를 넣어야겠어. 


나는 내일 새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어. 한국과 파나마를 오가며 롱디를 하시다가 결혼을 해서 남편이 사는 파나마로 오신 분인데, 연애시절부터 내 블로그를 구독하셨더라고. 게다가 내 책도 한국에서 사서 읽으셨어! 나보다 두 살 언니인데, 코로나 때문에 만남이 많이 늦어지고 온라인 댓글 위주로 연락을 해왔음에도 그 언니의 밝은 에너지가 느껴져. 긍정적이고 러블리하신 분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내일의 만남이 기대가 돼. 새 친구와의 대화에서 나는 어떤 풍경들을 보게 될까. 너와 나의 인연이 블로그 댓글에서 시작한 경험이 있다 보니 더욱 설레는지도 몰라. 오늘은 얼마쯤의 설렘을 품고 잠자리에 들 것 같아. 


우리의 편지가 52통이나 쌓였더구나! 그러는 와중에도 코로나는 변함없이 여전하니.. 참 안타깝고 씁쓸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코로나 블루에 빠지지 않도록 정신을 단디 차리고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는 일들을 많이 해보자! 그래서 난.. 오늘 깍두기를 또 담갔어. 국밥을 먹어야 하니까. 국밥은 나의 보장된 행복 아니겠니? 이번 주엔 깍두기가 익으면 국밥을 한 번 먹고, 보고 싶은 영화를 한 편 볼 거야. '줄리 앤 줄리아'라는 영화인데 혹시 봤니? 요리하는 영화라서 시호를 재운 후 술과 안주를 곁들인 밤에 보면 더할 나위 없겠지. 냉장고에 든든하게 채워 넣은 김치와 노트북에 깔려있는 영화, 어쩌면 어느 날 짠하고 식탁 위에 오를지도 모를 장조림, 그리고 아직 첫 페이지도 읽지 않은 소설도 한 권 있어. 어쩐지 이번 주는 희망찬 기분이다. 


너의 한 주도 네가 좋아하는 일들을 하겠다는 희망과 계획으로 시작하면 좋겠구나. 이외수 아저씨가 그랬어. 태양과 희망에는 임자가 없다고. 요긴하게 쓰는 놈이 임자라고 말이야! 



p.s. 시간 날 때 답장 좀.

파나마에서 채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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