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는 지워지거나 극복하는게 아니다. 잠시 덮어두는 것일뿐. 언제라도 그 기억의 조각을 맞추게 된다면 다시 튀어나올 수 있다. 영혜의 경우, 꿈이라는 무의식에서 그 조각을 꺼내어 맞추게 되면서 돌연 채식주의자를 선포하게 된 것이다.
강압적인 아버지의 억압 아래 살아오면서 언니와 다르게 큰 상처를 입은 영혜가 육식을 거부하는 행위는 폭력이 만연한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거부하는, 또는 포기하는 행위로 보인다. 사회는 너무 많은 폭력과 억압에 익숙해져있다. 그저 육식이 싫다며 거부하는 영혜에게 억지로 권하고 폭력을 쓰는 가족의 모습은 현대사회와 너무 많이 닮아 있다.
영혜는 아내로서 자식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사회가 요구한 역할일 뿐이다. 이것 조차도 어떤 면에서는 폭력이라 부를 수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아내로서의, 자식으로서의 모습. 무수한 억압과 폭력이 '정상', '평범', '상식', '규칙' 이라는 단어로 둔갑되어 일어난다. 영혜는 이것에서 나오는 역겨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한 것일 뿐이다. 익숙한 폭력이 어느 순간 생경하게 느껴진 것이다. 어쩌면 처음부터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됐을 가능성이 더 크다. 우리는 대부분 이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한다. 거부하는 이를 어르고 달래고 때려서라도 범주안에 두길 원한다. 정작 튀어나가려고 하는 이들이 왜 그런생각을 품었는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는 생각하려 하지 않는다. 작품에서 영혜의 생각은 단 한줄도 나오지 않듯이 말이다. 남편과 형부, 그리고 언니의 시점에서 영혜를 바라보며 그들은 자기좋을대로 영혜를 해석하기 바쁘다.
끝내 영혜는 말한다. 물과 햇빛만 있으면 되는 나무가 될거라고. 자신은 나무라고. 나무가 해로운 존재가 되기란 참 힘들 것이다. 그래서 되고싶었겠지.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어쩌면 폭력과 잔인함, 그 자체가 아닐까. 폭력에 대한 거부를 참신한 방식으로 풀어내어 와닿는 지점이 많은 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