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Lzit - 7평 프로젝트 3. 페인트 칠하기 전
무엇인가를 새롭게 하기 전,
무작정 채우기보단 가끔 비워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특히나 이다음에 해야 할 일이나
감당해야 할 사건이
더욱더 큰 부분을 차지할 것 같다는
어렴풋한 느낌이 든다면.
나는 페인트 칠하기 전 이런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공간의 분위기며, 느낌을 바꾸기 위해, 이 곳에 페인트를 칠하기 위해서 이 좁은 공간에서 부담되는 것들을 다 빼둬야 한다-생각했다. 페인트가 묻을까 봐-이기도 하고, 걸리적거려서 페인트 칠을 잘 못할까 봐-이기도 했다.
나보다 큰 수납장들을 말랑과 함께 끙차끙차 움직이며 오빠들을 수없이 부르긴 했지만 그들을 올 수가 없다. 온전히 그녀와 내가 해내야만 했던 일이었다. (겁나 무겁고 컸다......)
그녀와 함께 하나 둘, 셋- 으차. 이것을 반복할 때마다 사실 진짜 무거웠는데, 둘 다 불평불만 없이 조용히 했다. 크다 크다 했지만 못한다 못하겠다 하진 않았다.
작은 공간을 변화시키는데도 이 정도 에너지와 힘이 필요한데 사람이면 말해 무얼 할까. 누군가 자기 자신을 변화하겠다고 다짐한 것을 보았다면, 물리적인 변화보다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라 여겨줘야 한다. 응원해줘야 한다. 그 다짐과 결심은 흔히 오는 것이 아니고, 또 동시에 성공한다면 정말 그 사람은 변화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는 나 역시, 결심이 좀 필요하다.)
사람은 사람인지라, 변화한다고 곤충들처럼 번데기 껍질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덩치가 갑자기 자라는 것도 아니다. 오직 그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만 증명된다. 내 삶이 변했다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은 정말 내 삶을 변화시켜가는 나만이 뿜어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행동과 삶만이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 공간도 색을 하나씩 얻어갈 준비가 되어감에 따라 어떻게 사용될지- 엄청 기대했다. 공간은 생명이 없으니 사용하기 나름이겠지만, 그곳을 사용하는 사람과 방식에 따라 크게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공간이든 누가 사용하고,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공간이 살수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리적 요인이 주는 기타 효과들을 무조건 무시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마주친 작은 카페에 걸린 네온사인의 문구가 오늘 하루 수고한 우리들에게 던져준 작은 위로처럼 느껴졌다. '넌 너무 사랑스러워.' '오늘도 수고했어.' '내일 더 사랑스러워지자.' 시원한 초코 프라푸치노를 마시며 말랑과 수다를 떨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 길에, 조금은 차갑게 부는 바람에, 아려오는 발바닥도 조금은 괜찮은 하루였다.
이 공간을 비우면서, 비로소 우리의 공간을 이해하게 되었다. (바퀴벌레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알 수 있게 되었..크흠) 그리고 말랑에 대해서도 더 알 수 있게 되었다. 어느덧 10년 지기가 되었지만 모르던 날들이 더 많았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거리를 두는 법과 비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가는 중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빈자리엔 무엇을 넣을지 아니면 그대로 비워둘지는 조금 더 고민이 필요한 것 같다. 오늘은 딱 비우는 것까지만 느껴보기로 했다. 비움, 그 자체로 오늘은 꽉 찼으니까.
청소란 그 공간을
완전히 이해하게 만든다.
- 허지웅 '나의 친애하는 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