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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셔 Mar 19. 2016

미완성 히어로

우린 태어날 때 이미 충분한 완성이었어.

01. 옛글을 다시 읽어보다. 이전 커리어를 보며 지금을 떠올려본다.


02. 직선, 곡선 연습 10장.  그리고 오늘은 닉네임을 정하는 날이다.


'선생님'이라는 호칭보다 '체셔'가 더 익숙해진 나날들이 좋다. 학생들도 나를 '체셔'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하는 듯하다. 이유는 잘 모르겠다. 내가 닉네임을 쓰는 이유의 반만이라도 같으면 좋으련만, 친구같이 느끼는 것 같진 않다.


03. 아, 선 연습 이야기를 여기서 끝낼 순 없다. 우주의 탄생만큼이나 그들의 선 연습은 정말 다채롭고 아름답다. 절대 모두 같은 방법으로 연습하지 않는다. 나는 단 하나, [양 끝 점을 찍고 그 두 사이를 잇는다.]는 방법만 알려준다. 그들은 그 이야기만 듣고 자신의 앞에 놓인 빈 종이에 나름의 기준으로 선들을 채워간다. 색도, 방향도, 개수도 가지각색인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 안엔 곧게 그리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다. 그 의지만큼 성장하고 약간의 흔들림에도 멋스러운 작품이 될 그들의 가능성이 좋다.





04.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아 정말이지, 이 단어를 듣는 순간 나는 또 한 명의 고흐를 만난 기분이다. 우리에겐 닉네임을 정하는 방법이 있다. 생각나무로 '나'와 '되고 싶은 것'을 찾는다. 그 안에서 가장 마음이 가고 좋아하는 것을 고른다. 그리고 두 단어를 붙여서 나만의 닉네임을 만든다.


'이상한나라 앨리스'에서 체셔가 묻는다. 앨리스에게 "이곳에 왜 왔니?"

05. 나는 '날라리 체셔'다.  동화 안에서 체셔는 엄청난 존재감을 가지지만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체셔를 좋아하는 이유는, 앨리스에게 질문을 던진다는 것. 앨리스의 모험 시작부터 끝까지 곁에 있다는 것, 이 두 가지이다. 나의 생각나무에서 '나'는 '체셔'이고, '되고 싶은 것'이 '날라리'이다. 체셔의 이런 모습을 가진 사람, 그리고 때론 한없이 자유롭고 싶은 날라리.


06. 학생들의 생각나무 시간이 끝나고 각자 닉네임을 조합한다. 나는 교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닉네임에 아이디어를 제안하기도 하고 질문하기도 하고 불러주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ㅂㅈ의 차례. (실로 나는 그가 너무 조용해서, 그리고 혼자서도 너무 잘해서, 솔직히 그의 옆에 잘 가지 않는다.) 그는 조용히 손을 들고 자신의 닉네임을 알아서 만들고 나에게 조그마하게 말한다.


"저는 '미완성 히어로'입니다."


그의 닉네임을 듣는 순간, 가슴에 찡- 울림이 왔다. 그에게 있던 어떤 한 면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말이 나에게 '괜찮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로로 다가왔다.


07. 나는 그가 어떤 장애로 불리는 특징을 가지고 있어서 이 이름이 더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갑, 을이라는 단어 속에 사람을 가두고, 사람의 상처를 가지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것도, 내 이웃에 점차 무관심해져 가는 우리 사회엔 수많은 모순이 있지 않나 싶다. 그게 우리의 장애이지는 않을까.  


인맥, 돈, 경력, 사회적 지위 등 '사람'보다 우선시되는 많은 조건들이 우리를 점차 '사람답게'에서 벗어나게 하진 않나.


그래서일까, [저는 '미완성 히어로'입니다.]라는 문장을 듣는 순간, 나는 어쩔 수 없이 눈동자 끝이 시큼하고, 미완이지만 괜찮다 위로받고, 우린 누구나 히어로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사람이지 않은가, 미소를 짓는다. 우리는, 또 그들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살아오면서 듣기를, 히어로가 될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보다 미완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을 테고, 그게 쌓여서 스스로도, 그리고 상대를 볼 때에도 히어로라는 가능성을 보지 못한 것일 테다. 오늘은 그가 나를 이렇게 토닥이고, 내일은 내가 다시 우리를 토닥이는 나날들이 더 많아지기를. 서로가 서로의 히어로가 되는 무수한 매일이 쌓이길 바라는 기도와 즐거운 마음으로 수업을 마친다.


우리는 태어날 때 이미 충분한 완성이다.

나는 태어날 때 이미 충분한 작품이다.

너는 태어날 때 이미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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