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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알밤 Jun 15. 2023

4주 차: 조금 이른 임밍아웃


아직 임신 극초기여서 주변에 알리는 것은 조금 꺼려졌다. 아무래도 양가의 첫 아이이고, 12주 전까지는 유산이 많이 된다고 하기에 미리 알리는 것에 대해 많이 우려가 되었다. 그러나 남자친구가 어머님께 얼른 말씀드리고 싶어 하는 눈치가 있었고, 또 안정기에 들고 난 후에 말씀드리기에는 결혼식과 겹쳐 조금 애매할 것 같아서 양쪽 부모님께 임밍아웃을 하기로 했다. 마침 청첩장을 전달드릴 일이 있어서 전달드린다는 목적으로 찾아뵙기로 했기에 이유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그냥 가서 이야기드릴까 하다가 청첩장 뒷장에 임신 테스트기를 붙이고 ‘할아버지 할머니 내년에 만나요’ 하고 짧게 글씨를 썼다. 보자마자 시부모님의 반응과 아버지의 반응이 딱 떠올랐다.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하며 맞는지 한번 보자고 이야기했다.


먼저 우리 아버지를 만났다. 야외 벤치에서 잠시 앉아있을 때, 봉투를 드리며 열어보시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내 예상과 똑같았다. 임신 테스트기를 보시고 조용히 접으시더니 ‘얼마나 됐니?’ 하고 물으셨다. 그리고 잠시 아무 말 없으시다가 ‘축하한다’고 하셨다. 심플했다. 우리가 아직은 너무 초기라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설명드렸으나 다행히 의사이신 아버지는 그런 점을 잘 인지하고 계셨다. 말을 마치자마자 소고기 집을 예약해 주셨다. 내심 기쁘신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신 것 같았다. 무사히 임밍아웃을 마치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참고로 나는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다. 극심한 남아선호로 두 남동생들과 나를 차별하며 키워, 최근 6년은 연락을 끊었다가 결혼으로 인해 그나마 얼굴 한두 번 본 게 다이다. 이런 어머니이기에 굳이 임신을 미리 알리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 엄마인 척하며 나를 챙기거나 잔소리하는 모습은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도 이 점은 인지하셨는지 나중에 알리겠단 말에 다른 말씀은 없으셨다.


드디어 대망의 시부모님을 만나 뵙고 임밍아웃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팥빙수 가게에 앉아있었고, 마찬가지로 청첩장 샘플이라며 임밍아웃 편지를 쓰윽 내밀었다. 시부모님께서는 청첩장을 꼼꼼하게 살펴보시느라 눈치를 못 채셨다. 다 읽으시고 남자친구가 ‘뒷면도 살펴보세요’ 하는 소리에 그제야 뒤집어 보셨다. 그리고는 임신테스트기 붙인 걸 보고 웃으셨다. 웃으셨다? 우리는 너무 당황했다. 미리 알고 계셨나? 알고 보니 우리가 장난으로 뭔가를 붙인 것인 줄 아시고 웃으셨던 것이었다. 다시 자세히 보시더니 ‘어머나, 임신했나?’ 하고 물으셨다. 그렇다고 대답하자 아버님은 놀라셨는지 갑자기 멈추셨고 어머님은 너무 놀랐다며 눈물이 나올 것 같다고 하셨다. 그리고 임신 관련하여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가만히 남자친구의 얼굴을 보며 어머님이 말씀하셨다. ‘아들래미가 이제 애아빠가 되네’.


나는 저 말이 매우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나쁜 뜻으로 가 아니라, 모성애가 듬뿍 묻어난 말이어서, 나는 평생 저런 말을 들어본 적도, 들을 수도 없겠구나가 크게 느껴진 바였다. 남자친구네 가족과 우리 가족의 분위기의 큰 격차가 느껴진 순간이었다. 아직도 종종 시어머님이 하신 ‘아들래미가 이제 애아빠가 되네.’ 이 말이 떠오른다. 사랑으로 키워낸 자식이 드디어 어른이 되었다는 기쁨과 자랑스러움. 평소 남자친구를 보며, 올바르고 착실한 모습에 ‘어머님이 뿌듯하시겠네’라는 말을 종종 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내가 눈으로 본 바, 놀랍고도 부러웠다. 내가 무얼 어떻게 하든 평생 만족시킬 수 없는 나의 어머니이기에 저런 말을 듣는 건 이제 포기하고 있다. 다만, 내가 나중에 내 자식이 자랐을 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사랑과 조건 없는 믿음을 주는 부모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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