훗날 우스운 꼴 당하는 일 없기를
난방을 시작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배관에 이상이 생겼다. 열교환실 난방공급 배관에 누수가 발생한 것이다. 야간 당직근무 중이던 모범생 김 주임이 순찰을 하다가 발견한 고장이다. 그는 즉시 밸브를 잠그고 나서 그 상황을 나에게 문자로 알려왔다. 해당 구간의 난방공급 중지가 불가피했다. 일명 커넥터(connector)라고도 부르는 후렉시블 조인트(flexible joint)에 생긴 크랙이 원인이었다. 대표회의 의결을 기다릴 여유가 없어 신속한 보수가 필요했다.
후렉시블 조인트는 배관과 배관 사이에 설치된 신축성 연결배관이다. 난방수의 온도변화나 진동에 따라 팽창하거나 반대로 수축하기도 한다. 배관의 변형과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다. 아침에 출근하자마자 서둘러 열교환실로 갔다. 고장이 난 상황과 처방책을 과장에게 묻고 확인한 후 긴급 보수절차에 착수하였다. 빨리 보수업체를 수배하고 견적부터 받아보라고 채근하였다.
이번 보수에 필요한 비용은 무슨 계정과목으로 처리해야 하나. 수선유지비냐, 장기수선충당금이냐. 어차피 둘 중 하나를 적용하는 문제이지만 즉시 판단이 서지 않았다. 신중해야 했다. 잘못 적용하면 훗날 무거운 과태료 폭탄을 맞을 수도 있는 빌미가 되기 때문이다. 장기수선계획을 찾아보고, 실무 가이드라인도 살펴보는 등 뭔가 확신의 끄나팔을 찾아내고자 한동안을 고심하였다. 결국 수선유지비로 집행하는 것이 맞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부품 교체이니까.
소장 경력 5년 차에 들어선 지금도 비용의 성격을 구분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기준은 해석이나 판단의 여지가 많고 벌칙은 엄하다. 주택관리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 그런 애매모호 사이에서 고민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AI시대에 이런 문제도 챗지피티에 물어보면 정답을 알려 줄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방법이 훨씬 더 편리하고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오늘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훗날 누군가가 내가 처리한 그 일을 두고 잘못된 판단이라며 지적하는 우습고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도 이 정도 경력이면 전문가급에 도달했다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다. 공동주택 관리사무소장으로 5년 이상 근무한 경력이 있는 주택관리사는 시군구 지방공동주택관리분쟁조정위원회 위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대학의 조교수 이상이거나 변호사, 공인회계사, 세무사, 건축사, 공인노무사 또는 판사, 검사와 함께 구성원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이다. 시청이나 도청에서 운영하는 공동주택관리 감사반원이 될 수도 있다.
경력이 10년 이상이라면 국토교통부 중앙공동주택관리분쟁조정위원회 구성원이 될 수 있다. 공동주택관리에 관한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사람으로 보다 격상된 인정을 받을 수 있다. 그 직을 목표로 일을 한다기보다는 그 직이 요구하는 경력이 갖는 의미와 가치를 가름해 보는 것이다. 비록 일이 힘들고 고달프지만, 여건이 허락하는 한 묵묵히 일하며 나아가 닿고자 하는 등대 같은 지점들이다.
초보 시절, 다른 곳에서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다며 나를 찾아온 한 입주민이 있었다. 자기가 사는 단지의 관리소장이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어서 잠깐 들렀다고 했다. 당시 민원에 몹시 시달리고 있을 때여서 날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런 와중에 뜻밖에 같은 일에 종사한다는 주민과 만나고 보니 경계심이 누그러지고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있었다. 관리소장은 정년이 없어서 나이 70이 넘어도 이렇게 일하며 친구들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으냐며 만족감을 표시하였다. 그리고 나에게 소장 생활 오래 하라는 격려의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가 한 말 중 지금껏 잊히지 않는 대목이다.
주택관리 업무를 하다 보면 과태료 규정이 참으로 많다. 빠트리지 말고 잘 챙기라는 취지인 줄 알지만, 의욕이 꺾이고 주눅 들게 하는 덫으로 작용하는 예가 많아 불편하고 불안하다. 모두에서 언급한 계정과목 사례도 그렇다. 시청이나 구청 등 감독기관이 감사하는 경우 통상 과거 3년 내지 5년 치 업무수행 내용을 사정권에 둔다. 그 자리를 떠나더라도 그만큼의 시간이 지나기 전이라면 왠지 모를 불안요소가 뒤에 남는다는 얘기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일단 들여다보면, 지적사항이 나오기 마련이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그때 그 사람의 말처럼 내가 만일 나이 70세 넘어서까지 오래 일하다 그런 낭패를 당한다면, 그런 일에 과연 어떻게 대응하게 될는지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엄청 난감해 할 것이다. 앞으로 5년이거나 뒤로 5년이거나 신경 쓰이는 것이 너무나 많다. 이 바닥에 얽매여 일을 하는 한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다. 앞으로 실무경력이 더 축적되고 정말 프로급이 된다면 그런 염려에 초연할 수 있을까. 아, 그러다 늙어 죽지. 이 나이에 무슨 청승맞은 푸념이람. 기왕 가는 길, 자신 있게 그리고 대담하게 가자. 그리고, 내가 일했던 단지들이 부디 조용하고 평온하기만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