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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Nov 11. 2020

비상대책위원회

관리권을 찾아오기 위한 첫걸음

분양형 노인복지주택을 분양받아 입주한 사람들의 표정은 밝았다. 노인주택이고 복지주택이라고 하니 그 명칭이 찝찝하고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이사 들어오기 전에 살았던 아파트와 다름없는 모양이어서 그런 건 별로 상관하지 않는 눈치들이었다. 그런 문제는 마침내 살고 싶은 신도시에 입성했다는 자부심으로 금세 가려졌다. 게다가 새집에 입주했다는 것 자체로 성취감과 즐거움은 배가되었다. 인구가 밀집하고 주택난이 심한 수도권에서 주택분양에 당첨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부러움과 선망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살 집을 마련했다는 순수한 의미 외에도 집값 상승의 프리미엄(웃돈)을 챙길 찬스를 얻었다는 사실에 더 흥분하기도 한다. 신도시가 준공되고 점차 성숙 단계로 들어서면서 집값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상승하자 기회를 엿보던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크게 낙담하고는 내 집 마련의 기대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했다. 사실 나도 한때 그중 한 사람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시세보다 눈에 띄게 저렴한 가격으로 공급된 분양형 노인복지주택을 매수하여 입주한 사람들은 신바람이 나 휘파람을 불 만도 했다. 주택 유형이 다소 특별해 보이고 분양정보도 아는 사람만 알았다지만, 고령자 우선으로 선정하다 보니 신청자 나이가 100세 이상이 아니면 당첨을 안심할 수 없을 정도로 경쟁이 뜨거웠다는 후일담이 심심찮게 회자되기도 했다. 매수계약을 체결하면서 매수인은 누구나 60세 이상이라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그렇다면, 여기는 나이로 보면 정년퇴직한 사람들이 거주하는 은퇴 촌이나 다름없는 곳이라는 이름표가 붙을 만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양형 노인복지주택을 매수한 사람들은 일반 아파트를 분양받는 경우나 다름없는 희망과 기대를 가지고 있다. 내 돈 주고 내가 산 집이니 이상할 건 없다.     




입주개시일부터 6개월 정도 시간이 지나자, 전매 등 아직 손바뀜 작업이 진행 중이거나 세입자를 구하는 등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입주를 완료하였다. 모든 시설이 정상 가동되고 관리비도 정상적으로 부과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입주민들 사이에서는 관리비가 예상보다 많이 나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왔고 그 숫자는 갈수록 늘어났다. “웬 놈의 관리비가 이렇게 많이 나와, 그 집도 그래요?”. 이사 오기 전에 살던 집의 관리비에 비하여 훨씬 비싸다는 것이었다. 그 원인과 이유가 궁금한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관리사무소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관리사무소에 다녀온 사람들 다수가 불쾌한 표정으로 볼멘소리를 하며 나왔다. 직원들이 조단조단 설명은 고사하고 마치 무슨 완장이라도 찬 사람처럼 입주자들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나 건방지고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아예 못살고 허약한 사람들 대하듯 해서 아주 무시당하는 느낌이었다며 관리사무소 쪽을 바라보고 분개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점령군 같은 행세를 하려고 한다는 말까지 들렸다. 입주자 중에는 공무원, 공직자, 기업의 임원 등 간부, 의사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쟁쟁한 활동을 하다 은퇴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대체적으로 이런 사람들은 좀처럼 전면에 잘 나서지 않는 성향이 강하지만, 그렇다고 단지 내 상황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다. 주민들 얘기를 듣고 보니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이래서는 도저히 안 되겠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서비스와 태도에 대하여 누군가 나서서 입주민들의 불만을 전달하고 시정을 요구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구동성으로 뜻을 모았다. 그렇지만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고, 서로 눈치만 보는 등 입주민들을 결집하기 위한 마땅한 계기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관리비 문제로 관리소장을 비롯한 관리사무소 직원들과 옥신각신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입주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주택관리 업무로 옮아갔다. 관리비를 도대체 누가, 어떻게 결정하냐는 것이다. 관리소장은 입주민들이 뭘 모르고 무턱대고 따진다는 듯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가르치듯 말해주었다. “노인복지주택은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이 아니고 시설입니다. 그래서 관리방법도 아파트와는 달라요! 설치자가 관리하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고, 설치자는 우리 회사와 도급계약을 체결하여 관리하는 거예요”.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나 오피스텔 관리단 등 주민대표기구가 주택관리업체를 선정하여 계약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권한을 설치자가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입주민들의 의사는 완전히 배제된 채 설치자를 대리한 관리업자가 부과하는 대로 관리비를 잘 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다. 입주민들은 가장 기본적이고 민감한 문제인 관리비 결정 과정에 처음부터 참여할 기회가 없었다. 계약 당사자가 아니다 보니 문제가 있거나 애로사항이 있으면 건의하라는 것이다. “집주인인 우리가 봉이란 말이냐?”. 문제의 본질이 드러나자 뜻있는 사람들이 차차 등장하며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동대표를 해본 경험자, 현역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사람, 관리업체에서 간부로 일하는 사람, 부동산 기업에서 근무하는 사람 등 분야의 실력자들이 하나같이 “그런 법이 어딨어.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하고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사업자는 원래 입주예정자가 절반 이상 입주할 때까지만 관리하고, 그 이후에는 주민대표기구가 관리하도록 관리업무를 인계해야 한다며 상식적인 주장을 피력했다. 공동주택관리법과 집합건물의 건설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 규정된 내용이다. 노인복지주택은 공동주택이 아니라지만 집합건물인 것은 분명하므로 집합건물법에 따라 관리하면 된다는 주장이기도 했다. 주택관리에 관하여 노인복지주택의 설치 근거법인 노인복지법이 다른 법률만큼 체계적이고 짜임새 있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적용기준과 원칙은 담고 있다. 입주자들은 그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입주민들은 이제 “여기에 무슨 놈의 설치자가 필요하냐. 분양하고 돈 챙겼으면 시행사는 냉큼 물러갈 일이지, 이제 소유권도 없는 주제에 뭘 더 해 먹겠다는 말이냐. 당장 물러가라”며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하였다. 입주민들의 불만이 갈수록 들끓며 문제가 확대되자 관리소장이 시행사에 심각해진 단지 상황을 전달하고 긴급지원을 요청하였다. 책임자가 단지에 와서 입주민들이 납득할 수 있게 설명을 해달라는 것이다. 노인복지법을 잘 안다는 관리소장은 주택의 관리 권한은 법률로 확고하게 설치자인 시행사 대표에게 부여한 것이니 그런 점을 잘 이해시키면 될 거라고 판단하였다. 그리고 입주민 설명회를 두 번이나 개최하였다. 그러나 회의 때마다 고성만 주고받을 뿐 갈등이 해소되기는커녕 더욱 증폭되며 적대감이 깊어지고 앙금은 더 쌓여갔다. 시행사 대표는 시종 노인복지법에 규정된 사항이라는 답변으로 일관하였다. 입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법률에 위반될 뿐만 아니라 시청 노인복지과에서는 그에 따른 책임을 설치자에게 묻게 되니 그렇게는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문제의 구조가 더욱 분명해지고 상황이 복잡해지자 입주민 두 사람이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며 전면에 나섰다. 입주민들은 그들의 등장을 환영했고 기대치도 한껏 높아졌다. 대기업 임원 출신으로 나름의 추진력을 가진 손 선생이 앞장서고,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여 법률적 식견이 있고 직장에서 주택관리업무에 종사한 경험이 있는 이선생이 이론과 논리를 지원하며 여론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당장에 설치자인 시행사 대표, 노인복지주택 사업승인과 설치신고를 수리한 시청 노인복지과 담당 공무원, 그리고 노인복지 담당 시의원을 단지에 출석시켜 공청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3월 초,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초저녁에 단지에서 공청회가 시작되었다. 회의장은 참석한 입주민들로 꽉 찼다. 시청 공무원과 시행사 대표는 입주민들을 바라보며 전면에 배치된 의자에 각각 앉았다. 시의원은 다른 일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한다고 미리 전갈을 보내왔다. 주민대표로서 사회를 맡은 손 선생은 미리 준비한 질문지를 회의장에 입장하는 입주민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었다. 거기에는 과다한 관리비 등 그동안 드러난 문제점들이 조목조목 적혀 있었다. 손 선생이 마이크를 들고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회의를 시작하였다. 질문지를 만든 이선생은 회의자료를 손에 들고 청중석 맨 앞줄에 앉아 정면을 향해 진행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손 선생은 청중과 전면 내빈석을 번갈아 바라보며 간단히 인사하고 나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오늘 이렇게 귀한 시간을 내서 참석해주신 시행사 대표님, 시청 노인복지과 팀장님, 우리 단지의 관리업무에 대하여 납득할 수 없는 문제로 입주민들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제가 지금부터 주민들을 대변해서 물어보는 질문에 대하여 속 시원하게 답변해주시기 바랍니다”. 회의장은 순식간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손 선생은 청중석과 내빈석 사이에 서서 질문지를 보며 순서대로 묻기 시작했다.

     

설치자라는 게 여기 왜 있어야 하나. 소유권이 없는 시행사 대표가 설치자라는 게 말이 되나. 설치자의 지위를 주민대표에게 넘겨달라. 관리비가 일반 아파트 같은 평형보다 많이 나온다, 어찌 된 거냐, 대폭 줄여야 한다. 관리비가 많이 나오는 것은 인력을 과다 투입한 때문이라고 본다. 적정 인원으로 줄여라. 시행사가 관리업체를 입찰방식이 아닌 수의계약으로 선정하고 위탁계약이 아닌 도급계약을 체결해서 비용이 더 나가게 돼 있다. 처음부터 경쟁 없이 관리업체를 선정한 것이 문제이긴 하나 기왕 선정한 것을 인정하더라도 도급을 위탁계약으로 바꿔 실비정산이 가능하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 입주민들은 관리규약을 만들고 규약에 따라 동대표를 선출할 것이다. 시행사는 관리규약 인쇄비를 지원해달라...... 손 선생의 질문에 시행사 대표와 시청 공무원이 뭔가를 약속하는 발언이 나오면 청중들은 그때마다 환호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질문이 집중된 시행사 대표의 답변은 간단명료했다. 설치자는 자격이 법으로 정해진 사항이라 바꿀 수가 없다. 법률에 저촉되지 않는 방법이 찾아진다면, 설치자 자리를 내려놓고 물러가겠다. 관리비 인하를 위해 노력하겠다. 노인복지주택에서 관리규약은 적용되지 않는다. 운영규정을 적용하도록 법에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관리규약 인쇄비를 지원한다는 것은 법에 근거가 없는 비용을 지출하게 되는 것이니 굳이 원하신다면 저의 사비로 드리겠다. 손 선생의 주도로 열기를 뿜는 공청회는 어둠이 짙게 깔린 시간까지 계속되다 끝났다.



     

입주자들은 이제 관리의 주도권을 찾아올 수 있게 되었다며 즉각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하고 후속 작업에 돌입하였다. 위원들은 만장일치로 손 선생을 위원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러고 나서 동대표를 뽑고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하기 위한 선결 절차로 관리규약 제정 작업에 착수한 것이다. 앞으로 새로 제정하는 관리규약은 시행사가 이미 제작해서 입주자들에게 배포한 운영규정을 대체하게 된다. 노인복지법에 따른 운영규정을 적용해야 한다고 고수하는 시행사 대표의 주장은 헛소리처럼 무시되고 이미 폐기 수순에 들어갔다. 이것은 명확한 법률적 판단에 따른 것이라기보다는 입주민들의 주장을 현실화하는 조치였다. 이러한 주장과 논리는 전적으로 이선생에게 의존하고 있었고, 그에게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따라서 관리규약 제정 실무작업은 당연히 이선생이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며 추진되었다. 규약은 공동주택관리법과 집합건물의 건설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주로 혼합하고, 노인복지법의 필수사항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규약을 확정하기 위한 주민동의는 집합건물법의 규정에 따라 실시하였다. 즉 구분소유자의 3/4 이상과 의결권의 3/4 이상의 찬성을 얻기로 한 것이다. 소유자가 아니면 의결권이 없다. 그러나 노인복지법 시행규칙에 있는 시설운영기준은 꼭 이러한 절차로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어떻든 찬성 정족수를 채우는 과정에 여러 사람이 투입되었고, 특히 자기 집을 임대하고 외부에 거주하는 소유자들을 찾아 개별적으로 연락하고 협조를 구하는 일들이 매우 힘들었다. 지방 원거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전화로 독려하고, 팩스로 동의서를 받기도 하는 등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 곡절 끝에 관리규약은 전체 구분소유자의 85%에 근접한 높은 동의율로 확정되었다. 비상대책위원회는 규약에 따라 동대표 선거를 하고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한 후 해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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