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대책위원회가 해산하는 자리에서 일어선 손 선생은 자못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우리가 동대표를 선출하고 이어서 입주자대표회의가 출범하면, 설치자인 시행사는 관리권을 이양하고 물러갈 겁니다. 우리가 자율적으로 단지를 관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어요”. 관리규약을 높은 동의율로 확정한 사실도 다시 거론하며 비상대책위원회가 엄청난 일을 했노라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밥상을 이렇게 다 차려놨으니 설치자로부터 관리권을 찾아오는 일은 이제 입주자대표회의가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막걸리를 몇 잔 마셔서 얼굴이 붉으스레 달아오른 손 선생은 가장 힘든 일을 해냈다는 자부심 넘치는 표정으로 좌중을 주~욱 둘러보았다. 그렇지만, 비상대책위원회와 시행사 간에 있었던 의사소통의 결과는 함부로 장담할 수 없는 말장난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쌍방이 관리권 이양에 관하여 서면으로 명확하게 합의하고 약속한 것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입주민들은 설치자 물러가라고 목소리를 높여 외쳤고, 비상대책위원회는 그들을 대변하여 더욱 강력한 어조로 윽박지르듯 시행사의 완전한 철수를 주장하였을 뿐이다. 반면, 설치자인 시행사 대표는 법으로 허용이 된다면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설치자의 지위를 내려놓고 미련 없이 떠나겠다고 응수하였다. 공청회에서도 그랬고 수시로 진행한 실무협의 과정에서도 그렇게 구두 발언만을 주고받았다. 비상대책위원회 측은 설치자가 말한 ’적법한 절차‘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미련 없이 떠나겠다‘는 소리만 듣고서 드디어 약속을 받아냈다고 생각했다. 진즉부터 상대방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다. 그리고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고 나서 내심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언제나 치밀한 검토와 준비로 무장한 시행사 대표는 확실하게 약속한 바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그렇게 노인복지법을 염두에 둔 ’적법한 절차‘를 언급하면 사회 경험 많은 주민대표들이 응당 협상하자고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안타깝게도 서로가 불신하고 경계하다 보니 접점을 찾아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각자 머릿속으로는 자기중심의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설치자인 시행사 대표가 진정으로 물러날 의사가 있었고 그러기를 원했다면 자문 변호사를 두고 있는 그의 대응은 사뭇 달랐을 것이다. 설령 비상대책위원회가 그렇게 말로만 약속을 받아내고자 했더라도 당연히 그는 합의사항을 만들고 대표자끼리 서명하자고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물러날 의사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그렇게 하자고 손을 내밀지 않았다. 입주민들을 대표하는 손 선생이나 뒤에서 일을 도와주던 이 선생이 그런 확실한 방법을 택하지 않은 것은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웠다. 아쉬운 쪽은 시행사가 아니라 입주민들이라는 건 너무나 뻔한 상황 아니던가. 시행사에 대한 불만과 불신이 큰 상황에서 왜 그렇게 어정쩡하게 일을 했을까? 마음만 앞선 나머지 너무 성급했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노인복지법에 따르면, 설치자는 변경 대상이 아니다. 설치자 변경에 관한 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시설을 설치하거나, 폐지 또는 휴지 하고자 하는 경우 미리 시장에게 신고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그러니 입주민들이 설치자 물러가라고 요구하거나, 혹은 설치자가 시설을 폐지하지 않은 채 다른 이유로 물러가고 싶다고 하더라도 그중 어느 것도 허용이 되지 않는다. 다만, 변경할 수 있는 것은 설치자가 시장에게 제출한 신고사항에 한한다. 즉 시설의 명칭, 소재지, 입소(이용) 정원, 시설의 종류, 시설의 장 또는 법인 대표자 등 설치신고서에 기재한 내용만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법률 규정을 빤히 알고 있는 시행사 대표가 ’적법한 절차‘를 노래 부르듯 말하고 나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와 논리가 있었다. 노인복지주택 운영관리는 설치자가 담당하도록 법으로 규정한 사회복지사업이다. 이미 챙긴 분양수익 외에 추가로 관리수익을 자자손손 대를 이어 얻을 수 있는 매력적인 사업 기회를 자신이 만들어놓은 것이다. 이런 달콤한 열매를 이제 막 따먹기 시작했는데 벌써 내줘야 한다면 얼마나 가슴 쓰릴 일이겠는가. 그러니 어쩔 수 없이 물러나야 할 때 떠나가더라도 시간을 끌 수 있는 한 최대한 끌어보자는 것은 사업가라면 당연히 하는 속셈이다.
시청 노인복지과에서는 관리규약이 제정되자마자 운영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촉구하는 문서를 시설의 장과 관리소장에게 이미 보내 놓은 상태였다. 시설의 장은 노인복지주택에 상근 하면서 운영관리업무를 총괄하는 책임자이고 설치자가 임명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시행사 대표인 설치자는 시설의 장을 따로 임명하지 않고 자신이 맡겠다고 시청에 일찌감치 신고해놨다. 1인 3역을 하겠다는 것이다. 노인복지과에서는 입주 후 1년이 넘도록 운영위원회를 설치하지 않고 있는 우리 단지에 운영위원으로 위촉할 입주자대표 2명을 추천해달라고 여러 차례 독려하고 있던 차였다. 이번에도 자기네들이 지정하는 날까지 추천하지 않으면 불가피 행정처분을 하겠다며 촉구와 경고를 겸한 공문을 보내온 것이다. 운영위원회를 구성하지 않으면 설치자가 시청의 행정처분을 받게 된다는 사정을 알게 된 비상대책위원회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이때가 설치자를 내쫓고 관리권을 가져오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하고 시행사 대표에게 이렇게 제안을 하였다. “우리는 당신들이 행정처분을 받지 않도록 협조---주민대표 두 명을 추천---할 테니, 당신들은 우리가 관리규약을 만들고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하는 데 협조해달라”. 행정처분을 받을 상황에 직면한 시행사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입주민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한 결정이기는 하지만 전국에서 사업을 하는 기업으로서는 무엇보다도 행정처분을 피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비상대책위원회는 시청에도 문서를 보내 협조를 구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동대표를 뽑고 운영위원을 추천하겠으니 그때까지 기다려달라고 기한 연장을 요청하였다.
동대표들이 선출되고 입주자대표회의가 정식 출범한 것은 이처럼 관리권 인계인수에 관하여 쌍방의 입장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뤄졌다. 시행사 대표가 설치자 자리에서 물러나고 주택관리업무를 주민대표에게 넘겨주겠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이끌었던 손 선생과 그를 도와 같이 일했던 이 선생 등 주변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를 받고 출마하여 동대표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 당선하였다. 손 선생은 회장이 된 나에게 밥상은 이미 차려져 있으니 관리권을 잘 찾아오시라며 따로 환기를 시켜주었다. 입주자대표회의가 구성되자 관리사무소장은 관리규약으로 정한 바에 따라 동대표 8명 중 회장인 나와 감사인 오 대표를 운영위원으로 추천하는 문서를 시청 노인복지과에 보냈다. 며칠 후, 설치자인 시설의 장이 운영위원회를 개최하겠다는 문서를 보내왔다. 마치 설치자와 시청 노인복지과가 손발을 맞추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지만 더 이상 의심할 필요는 없었다. 추천한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대표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똑같은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원 중 딱 두 사람만 운영위원회에 참석한다는 것이 운영위원회를 옥상 옥의 상급 기구로 인정하는 자충수를 두는 것 같아서였다. 그렇지만 입주자대표는 최대 두 명까지 운영위원으로 위촉할 수 있다는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른 것이어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 내용을 이미 알고 있었던 비상대책위원회 손 위원장은 설령 규정이 그렇더라도 설치자가 주도하는 운영위원회는 입주자대표가 형식적으로만 참여해주고, 실제 관리권은 공동주택관리법이나 집합건물법에 따라 입주자대표회의가 행사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과연 그래도 되는지 법률적 검토가 필요한 문제였지만, 단지 내에서 전문가로 정평이 난 이 선생의 판단에 따라 과감하게 밀어붙이자는 전략이 거침없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면 이미 소유권이 없는 설치자가 물러갈 것이라는 계산에 따른 것이다. 반면, 설치자는 이제 입주자대표가 추천되었으니 시장의 위촉을 받아 운영위원회를 정상적으로 가동하면 행정처분 사유는 자연히 소멸한다는 점을 중시하였다. 즉 설치자의 지위에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노인복지법에 따른 설치자로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데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다. 법률 적용에 있어 공동주택관리법(또는 집합건물법)이냐 노인복지법이냐를 사이에 놓고 다투는 거친 대립 양상이 전개되었다. 그렇지만, 시행사는 노인복지주택의 설치 근거법인 노인복지법에 따르지 않고 공동주택관리법이나 집합건물법을 적용하는 것은 법률 위반이라는 주장을 여전히 굽히지 않고 있었다. 시행사 대표는 자문 변호사의 법률 검토를 토대로 대응하는 반면, 비상대책위원회는 오로지 법률 전공자인 이 선생의 판단과 지도에만 의존하였다. 프로와 아마추어가 맞붙어 다투는 것이나 다름없이 이 같은 설전을 거듭하였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들은 매듭을 짓지 못한 채 임시 봉합된 상황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단지에서 운영위원회가 열렸다. 사전에 시설의 장이 문서로 알려 온 바에 의하면, 회의 날짜와 장소만 기재되어 있을 뿐, 운영위원 명단은 없었다. 입주자대표 2명 외에 나머지 인사는 대체 누구인지 궁금하였다. 회의가 시작되고 관리소장이 회의자료를 나눠주었다. 거기에는 시장이 위촉한 운영위원 명부와 위촉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시설의 장, 관리소장, 사회복지사, 그리고 입주자대표인 회장과 감사. 이렇게 다섯 명이 전부였다. ’아니, 관리소장과 사회복지사가 운영위원이란 말이야?‘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인 나는 도저히 급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며 그들을 쳐다보았다. 노사간담회 하는 것도 아니고 입주자대표의 지휘를 받는 직원들이 어떻게 동급으로 마주 보고 앉는다는 말인가. 게다가 그들은 당연히 시설의 장과 함께 움직일 것이어서 우리가 3대 2로 불리하게 짜인 구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사정도 모르고 나는 시행사 측과 관리권 이양 문제가 잘 정리돼서 이미 밥상이 잘 차려져 있다는 비상대책위원장의 말만을 듣고 나름대로 회의 준비를 착실히 하고 참석하였다. 이 자리에서는 당연히 관리권을 우리가 넘겨받는 확인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관리권 이양에 관한 합의서 안을 내가 직접 PC로 작성하고 출력하여 가져와 시설의 장을 비롯한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운영위원회 첫 회의인 만큼 위원장을 호선으로 뽑는 것이 가장 먼저 할 일이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그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합의가 되었다는 관리권을 이양하는 합의서에 시설의 장인 설치자와 입주자대표인 내가 대표로 서명하자고 제안하였다. 시행사 대표는 그런 약속한 적 없다고 잘라 말하며 거절하였다. 그리고 모든 문제는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면 되는 것이니 입주민들의 요구사항은 운영위원회에 건의해달라고 하였다. “이것 보세요,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관리업무를 우리한테 이양하기로 하였으면 그것부터 이행해야죠. 운영위원회가 무슨 상급기관이라도 되나요?”. 나는 말도 되지 않는 소리라며 되받아쳤다. 시행사 대표는 아까 한 말을 다시 되풀이하며 역시 거부하였다.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관리규약과 입주자대표회의는 입주민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자치규약이고 자치단체에 불과한 것이어서 법적으로 아무런 효력이 없습니다”. 그는 전혀 긴장된 표정 없이 또박또박 할 말을 다 하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참‘. 관리권을 이양할 뜻이 없다는 그의 의중을 직접 확인한 만큼 나는 더 이상 거기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손 선생이 나에게 한 말과 달리 바뀐 건 아무것도 없었다!
손 선생 등 회의 결과가 궁금한 사람들은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는 내 말을 듣고는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며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였다. ’저들이 생각이 없다는데 더 이상 내가 뭘 어떻게 하나?‘. 운영위원회는 형식적으로 참석하고, 관리업무는 입주자대표회의가 강력하게 밀고 나가면 된다는 손 선생의 주장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 이제 나와 손 선생 사이에 심한 견해차가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손 선생의 주장대로 강행하게 되면 시행사의 반발은 불을 보듯 뻔해 보였다.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충돌하는 상황에서 예상되는 시행사 대표의 다음 수순은 법적 대응 밖에는 다른 선택의 수단이 없다고 봤다. 그런 상황이 전개되면 문제가 더욱 복잡해지고 당초 목표로 한 관리권 확보는 더 요원해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 손 선생과 이 선생은 차라리 이 참에 우리가 소송을 제기하자고 하였다. 소송을 통하여 설치자를 주민대표로 바꾸고, 관리업무도 가져오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우리가 소송을 걸면 이것이 복잡한 문제가 아니니만큼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 않고 결과가 금방 나올 것이라고 자신하였다. 하지만 나는 반대하였다. “과연 그럴까요? 소송이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소송비용 마련도 쉽지 않을 겁니다”. 소송을 주장하는 이 선생이 직접 소장을 작성해서 나에게 보내오기도 하였다. 나는 이 문제를 끌고 가야 할 책임자로서 소송보다는 협상으로 가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결과를 얻기까지는 소송보다 협상이 더 빠를 것이라는 나의 소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