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 그림을 교환하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운영위원회 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나의 마음은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서 이제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했다. 법률적 문제를 검토하고 조력하는 이 선생은 여전히 소송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며 나에게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였다. 노인복지주택이 노유자시설이라 하지만 집합건물이기도 하므로 집합건물법상 관리인의 권한을 행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권한이란 관리단의 사무 집행을 위한 분담금액과 비용을 각 구분소유자에게 청구하고 수령하는 행위다. 관리규약에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집합건물법상 관리인이기도 하다고 정의한 조항을 두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소송비용은 각 구분소유자의 지분 비율에 따라 징구하면 될 일이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소송이냐, 협상이냐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하여 극단의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내키지 않은 방법이다. 협상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대립하는 대신 상호 존중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무래도 그게 나의 성향에도 맞다. 그래야 잘 할 수있다. ‘그래, 대화로 풀어보자!’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주변의 강경론자들에 휩싸여 고뇌를 거듭한 끝에 "대화로 물꼬를 트겠다"며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회의를 파행으로 끝냈던 기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신경전만 벌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봐야 우리가 손해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서 일을 추진해야 할 책임감도 컸다. 아쉬운 쪽이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할 만큼 한 사람으로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로 하였다. 시행사 강 대표 역시 제대로 된 경영인이라면 당연히 나의 제안에 응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약속을 잡기 위하여 그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고맙기도 했다. 그는 나보다 20년 아래인 젊은이였다. 물론 그도 그런 차이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기업을 경영하는 대표이고 협상의 상대방인 만큼 나는 처음부터 그를 대표님이라고 부르며 정중히 예우하였다. 적절한 감정적 지불은 상황과 여건을 개선하고 진전시키는 윤활유이자 촉매제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 대표와 나는 약속 장소인 서울 강남역 근처의 한 커피집에서 첫 만남을 가졌다. 일대일로 보는 협상의 자리인지라 다소 긴장이 되었다. 하지만,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몇 마디 주고받다 보니 편안하고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며 차차 감정이 안정되었다. 강 대표가 카운터에서 주문한 아메리카노 커피를 손수 들고 와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회장님, 여기 커피 드시죠.“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얘기를 시작하자 곧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사람들로부터 날 선 공격의 표적이 되었던 그는 나의 부드러운 인상과 거칠지 않은 언사에 안도하는 듯 조심스럽게 호응하는 모습이었다. "입주민들은 구분소유자로서 주택의 관리권을 직접 행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솔직히 관리권을 입주민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생각을 진즉부터 해왔습니다". 강 대표가 상기시키듯 나에게 털어놓았다. '그래요? 미처 몰랐네요' 속으로만 놀랄 뿐 나는 그런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전제조건이 있다고 했다. 면책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면책? 면책이라...’ 나는 강 대표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순간 궁금하였다. 주택관리업무를 입주민들이 주도적으로 하게 되면 자신은 관리책임이 없게 되는 것이니 그 점을 확실히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 우리가 관리하게 되면 그때부터 관리책임은 당연히 우리가 지는 것이지 강 대표님이 더 이상 책임질 일이 뭐가 있죠?“ 나는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다며 반가운 속내를 감추고 자신 있게 반문하며 웃었다. 그러자 강 대표는 오히려 내가 아직 법률 규정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얇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잠시 탁자 아래로 돌렸다.
노인복지주택의 운영관리 책임은 시설의 장이 담당하도록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경기도에 소재한 우리 단지의 시설의 장은 시행사 사장인 강 대표가 서울 본사에 근무하며 겸직하고 있다. 노인복지주택이 오로지 잡음 없이 잘 굴러가기만을 바라며 관리·감독권을 행사하는 시청 노인복지과 공무원들은 주택에서 민원이 발생하면 시설의 장에게 책임지고 처리하라고 문서를 보낸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시설의 장의 모가지를 한 손에 휘어잡고 그런 방식으로 책임을 추궁한다는 것이다. 심각한 예를 하나 들자면, 시설의 장이 운영위원회를 설치하지 아니하거나 운영하지 아니하는 경우 노인복지법에 따라 행정처분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시장은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라 시설의 장 교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법률은 냉엄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청은 그렇게 냉정한 곳이다. 만약 시설의 장을 강 대표가 아닌 현장의 다른 사람이 담당하였다면 시청의 타깃은 당연히 달랐을 것이고, 시행사 대표로서의 부담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 직을 내려놓지 않았다. 자기가 아니라면 과연 누구에게 그 직을 맡기는 것이 좋을지 고뇌만 할 뿐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확실히 강 대표가 나보다 더 실무에 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입주자가 미리 거기까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젊은 사장이 생각보다 현안을 잘 파악하고 있군’ 나는 강 대표가 그렇게 세부적인 사항까지 파악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다. 기업의 대표자이니 큰 줄기 위주로 챙기며 부하 직원들을 지휘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관리권을 입주민들에게 이양한다는 대원칙만 합의할 수 있다면 성공’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일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건 택도 없는 나의 실수였다. 그는 이미 나의 기대치를 뛰어넘어 관리권 이양에 따르는 걸림돌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합당한 방안을 찾고 있었노라고 바로 내 앞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강 대표를 상대로 협상을 계속하려면 기본적인 법령부터 잘 숙지해야 했다. ”회장님, 그 책임 없다는 것을 시청이 확인하고 인정해주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시청에 진즉 질의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입주민들에게 관리권을 이양하면 그때부터 우리가 관리책임을 더 이상 안 져도 되는 것 아니냐, 다시 말하면 시청은 우리에게 관리업무와 관련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면책을 인정해줄 수 있느냐 하고 말이죠. 근데 시청에서는 도무지 답이 없는 겁니다.“ 듣고 보니 강 대표 말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법률 규정에 충실한 시청 공무원들이 강 대표가 요구하는 면책 보장 내용을 문서화할 가능성은 단 1%도 없다고 봤다. 거기에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하여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를 하는 자체가 익히 잘 알려진 공무원의 생리를 무시하는 무리한 요구로 보였다. 그렇지만 오늘 강 대표와 대화를 하면서 각자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을 드러내 보여준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 대표가 관리권 이양 의사를 나에게 분명히 표시해줌으로써 이제 대립을 지양하고 상호 협력해야 할 중요한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이 관리권 이양의 실현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같이 뛰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공감한 것은 더욱 고무적인 진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