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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Dec 15. 2020

닭갈비와 소용돌이

시청에서 다듬은 협상목표

   9월 초 첫 만남에서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든 이후, 나는 여러 차례 서울에 가서 강 대표를 만났다. 그를 우리 주택단지로 와달라고 부를 수도 있었지만 나는 일부러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어른인 내가 직접 찾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강 대표에게 조금 더 호소력이 미치리라고 생각하였다. 그것은 또한 그로 하여금 나에게 성의를 보여달라는 압박의 표시이기도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관리권을 찾아와야 한다는 우리 단지 입주민들의 여망과 절박함, 그리고 사업하느라 바쁠 강 대표의 입장을 배려하고 있다는 나의 마음이 무언중 전달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대화를 시작한 지 2개월이 다 되어가도 만나는 횟수만 거듭될 뿐 별 진전이 없었다. 그것은 결국 시청 노인복지과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설령 자신들이 양보해 관리권을 넘겨주더라도 책임은 그대로 짊어지고 있는 꼴이 되니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나는 시청의 회신 여부와 상관없이 이 문제를 이달 말까지는 매듭지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회장으로서 입주민들 앞에 조기에 성과를 만들어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앞선 나머지 쿨하게 양보하라는 요구였다.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고 나를 바라보며 왜 지금 시한을 정하려고 하느냐며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예상하지 못한 강 대표의 강한 반응을 보고 나는 당황하며 잠시 그의 두 눈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청을 설득해야 하는 데 그걸 빼놓고 어떻게 더 얘기할 수 있겠느냐, 우리끼리 기한을 정해봐야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항변을 그의 눈초리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생각이 좀 짧았군.’ 가만 생각해보면, 그도 나름대로 고민을 토로하는 거라서 무턱대고 관리권을 내놓으라고 윽박만 지르는 것이 합리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이제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이미 수면 위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우리 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바로 그 지점에서 정체될 수밖에 없었다. 가급적 시청을 개입시키지 않고 우리 둘 당사자끼리 해결하고 싶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시청도 엄연한 삼각 당사자의 일원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아예 멀리하기도 어렵고 그렇다고 늘 가까이하기도 싫은 시청 노인복지과가 마치 닭갈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그들의 협조 없이는 합의점을 찾기 어렵겠는 걸... “ 돌파구를 시청에서 찾아야 했다.

     



   “한 팀장님, 안녕하세요!” 다른 동대표 두 명과 같이 시청 노인복지과를 찾았다. 교착상태에 빠진 관리권 이양에 관한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방문은 시청의 긍정적 회신을 기다리고 있는 시설의 장 강 대표를 지원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한 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일행을 상담 탁자로 안내하더니 곧 주무관과 같이 와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간 강 대표와 협의해온 내용을 먼저 설명해주었다. 설치자가 관리권을 우리에게 인계할 의사는 있지만, 시청이 인정해줘야 가능하다고 하니 좀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내 말을 듣고 난 한 팀장은 싱겁게 웃더니 쳐진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우리가 따로 해줄 게 없죠. 그걸 인정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시청이 어떻게 보낼 수 있겠어요. 안 그래요?” 그녀는 내가 앞서 예상한 그대로의 반응을 보였다. 강 대표가 요구하는 관리권 이양 후의 면책은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나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문제에 시청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운영위원회를 탈퇴하겠소.” 나는 돌연 운영위원회를 들먹이며 압박하였다. 지난번 운영위원회 회의 때 느꼈던 불편한 심기가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다. “운영위원회 가동하지 않으면 그거 행정처분 대상이 되는 거 아시죠?” 한 팀장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뜻밖의 발언을 하였다. “행정처분요?” “네, 행정처분 받으면 시설이 폐지될 수도 있어요.” “그래요?” 우리는 그 말을 듣고 차라리 잘 됐다며 동대표들끼리 약속이나 한 듯이 서로 바라보며 눈을 마주쳤다. 설치자를 내쫓는 방안의 하나로 시설을 폐지하는 것도 이미 검토한 바 있기 때문이다. 회의는 춤을 추고 상황은 엉뚱한 방향으로 돌변하고 말았다. 강 대표와 대화가 중단되어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 사이 예상치 못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우리가 그에게 우군이 되어주려고 시청에 왔다가 오히려 그를 공략해야 할 대상으로 파악하고 입장을 180도 바꾸게 됐으니까. 시청은 어디까지나 관리·감독만 할 뿐 어떤 경우에도 관리행위에는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방침도 확인하였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관리권을 인수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취한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개념을 정리한 적이 없었다. 다만 막연하게 입주자대표가 시설의 장을 맡아 관리업체를 선정하고 계약을 체결할 수 있게 되면 족하다고 생각하였다. 즉 그러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격을 갖춰야 하는지를 미리 파악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그게 그렇게 얼렁뚱땅 주장할 일이 아니어서 ’그렇게 하면 되나?‘ 하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하고 있었다. 기왕 방문한 김에 나는 그것을 한 팀장에게 물어보기로 하였다. 앞으로 강 대표와 줄다리기할 협상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를 정확하게 정리해두는 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팀장님, 관리권을 가져오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하나요?” “그야 시설의 장과 사업자등록증을 갖춰야죠.” 아, 그렇구나. 사업자등록증! 모르면 역시 직접 물어보는 것이 지름길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난번 입주자대표회의를 구성한 직후 세무서에 가서 사업자등록을 신청했다가 자진 철회한 적이 있었다. 시행사가 이미 사업자등록을 한 상태이기 때문에 같은 장소에 중복하여 내줄 수 없다며 세무서에서 사실상 반려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업자등록을 하기 위해서는 강 대표가 먼저 사업을 폐지해줘야 하는데 지금 상황에서 그게 먹혀들 여지는 없다. 소송은 택하지 않기로 하였으니 그들을 밀어내기 위해서라도 이제 협상은 불가피해졌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한 팀장은 나에게 설치자를 상대로 행정심판이나 소송을 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그건 시청이 중간에 끼어들기 싫으니 당신들이 스스로 해결하라는 제스처였다. 나는 이미 내부적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어서 그것도 생각 중이라고 형식적인 말 만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우리는 단지로 돌아와 오늘 한 팀장과 대화한 내용을 포인트로 삼아 협상 목표를 두 가지 방안으로 추진하기로 정리하였다. 우선, 설치자와 시설의 장을 입주자대표로 바꾸고, 사업자등록증을 입주자대표회의 명의로 발급받는 것을 제1안으로 하였다. 아예 모든 지위와 권한을 일괄 찾아오자는 방안이다. 만약 그중 설치자 변경이 어려운 경우, 시설의 장 변경과 사업자등록증 발급만을 추진하는 것을 차선책으로 마련하였다. 

     



   1주일 후, 우리는 실력행사를 하기 위한 임시회의를 열고 설치자가 주관하는 운영위원회를 탈퇴하기로 결의하였다. 동대표로서 두 명이 참여하는 회장과 감사가 운영위원 직을 사퇴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바로 시청 노인복지과를 방문하고 시장 명의의 운영위원 위촉장을 반납하였다. 그러자, 다음날 강 대표는 사퇴로 결원이 발생한 운영위원 2명을 다시 뽑겠다며 시설의 장 명의로 된 모집 공고문을 엘리베이터마다 게시하였다. 이렇게 된 마당에 굳이 입주자대표로 선출된 사람이 아니더라도 희망하는 입주민을 운영위원으로 위촉하겠다는 강수였다. 그러나, 선거를 통하여 버젓이 입주자대표를 선출해놓은 마당에 자신이 운영위원 하겠다며 낯 두껍게 손들고 나올 사람이 있을 리 만무했다. 나는 강 대표의 시도를 저지하고, 시장이 운영위원을 다시 위촉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아둬야겠다고 생각하고 동대표들과 함께 시청 노인복지과로 달려갔다. 그리고 미리 작성하여 가져 간 ‘운영위원 위촉 결사반대’ 경고문을 노인복지과장 앞에서 읽고 직접 전달하였다. 만일 다른 입주민을 운영위원으로 위촉하려 한다면, 우리는 주민들과 함께 몰려와 강력히 저지할 것이라고 엄포를 놓고 돌아왔다. 며칠 후, 갑자기 사태가 더 꼬여가는 상황을 인지한 강 대표가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이번에는 그가 우리 단지로 오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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