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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Dec 11. 2020

협상을 위한 정지작업

머릿속 그림을 교환하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운영위원회 회의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나의 마음은 심란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서 이제 새로운 해법을 모색해야 했다. 법률적 문제를 검토하고 조력하는 이 선생은 여전히 소송으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며 나에게 강경한 대응을 주문하였다. 노인복지주택이 노유자시설이라 하지만 집합건물이기도 하므로 집합건물법상 관리인의 권한을 행사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 권한이란 관리단의 사무 집행을 위한 분담금액과 비용을 각 구분소유자에게 청구하고 수령하는 행위다. 관리규약에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집합건물법상 관리인이기도 하다고 정의한 조항을 두었기 때문에 얼핏 보면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렇다면 소송비용은 각 구분소유자의 지분 비율에 따라 징구하면 될 일이었다. 설령 그렇더라도 소송이냐, 협상이냐 두 갈래 길에서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송을 제기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이기기 위하여 극단의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다. 협상을 선택한다면 우리는 대립하는 대신 상호 존중하고 협력하는 가운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협상의 대가 스튜어트 다이아몬드(Stuart Diamond) 교수가 책에서 가르쳐 준 바로 그 협상론이 내 머릿속에서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그래, 대화로 풀어보자!’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는 나의 방식이기도 해서 선택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동안 주변의 강경론자들에 휩싸여 온 나는 고뇌를 거듭하는 모습으로 그들을 만나 "대화로 물꼬를 트겠다"며 양해를 구했다.   




회의를 파행으로 끝냈던 기억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신경전만 벌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래 봐야 우리가 손해다.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으로서 일을 추진해야 할 책임감도 컸다. 아쉬운 쪽이기도 하고 사회생활을 할 만큼 한 사람으로서 내가 먼저 손을 내밀기로 하였다. 시행사 강 대표 역시 제대로 된 경영인이라면 당연히 나의 제안에 응하리라고 생각하였다. 약속을 잡기 위하여 내가 전화를 하자 그는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은 면모를 보여줘서 고마웠고 그런 면모를 확인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는 나이가 나보다 20년 아래인 젊은이였다. 물론 그도 그런 차이를 사전에 파악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중요치 않았다. 기업을 경영하는 대표이고 협상의 상대방인 만큼 나는 처음부터 그를 대표님이라고 부르며 정중히 예우하기로 하였다. 적절한 감정적 지불은 상황과 여건을 개선하고 진전시키는 윤활유이자 촉매제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강 대표와 나는 약속 장소인 서울 강남역 근처 커피집에서 첫 개별 대면을 하였다. 일대일로 만나니 다소 긴장이 되기도 했지만, 편안하고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감정이 서서히 안정되었다. 강 대표가 카운터에서 주문한 아메리카노 커피를 손수 들고 와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회장님, 여기 커피 드시죠.“ ”네, 감사합니다.“ 우리는 얘기를 시작하자 곧 서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솔직하고 허심탄회하게 주고받았다. 그동안 비상대책위원회 사람들로부터 날 선 공격의 표적이 되었던 그는 나의 부드러운 인상과 거칠지 않은 언사에 안도하는 듯 조심스럽게 호응하는 모습이었다. 입주민들은 구분소유자로서 주택의 관리권을 행사하기를 원한다고 내가 먼저 말했다. 강 대표는 솔직히 관리권을 입주민들에게 넘겨주겠다는 생각을 진즉부터 해왔다고 상기시키듯 털어놓았다. '그래요? 미처 몰랐네요' 속으로만 놀랄 뿐 나는 그런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는 전제조건이 있다고 했다. 면책을 보장해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면책? 면책이라...’ 나는 강 대표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순간 궁금하였다. 주택관리업무를 입주민들이 주도적으로 하게 되면 자신은 관리책임이 없게 되는 것이니 그 점을 확실히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야 우리가 관리하게 되면 그때부터 관리책임은 당연히 우리가 지는 것이지 강 대표님이 더 이상 책임질 일이 뭐가 있죠?“ 나는 문제가 의외로 쉽게 풀릴 수도 있겠다며 반가운 속내를 감추고 자신 있게 반문하며 웃었다. 그러자 강 대표는 오히려 내가 아직 법률 규정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듯 얇은 미소를 지으며 시선을 잠시 탁자 아래로 돌렸다.     



 

노인복지주택의 운영관리 책임은 시설의 장이 담당하도록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경기도에 소재한 우리 단지의 시설의 장은 시행사 사장인 강 대표가 서울 본사에 근무하며 겸직하고 있다. 노인복지주택이 오로지 잡음 없이 잘 굴러가기만을 바라며 관리·감독권을 행사하는 시청 노인복지과 공무원들은 주택에서 민원이 발생하면 시설의 장에게 책임지고 처리하라고 문서를 보낸다는 것이다. 공무원들이 시설의 장의 모가지를 한 손에 휘어잡고 그런 방식으로 책임을 추궁한다는 것이다. 심각한 예를 하나 들자면, 시설의 장이 운영위원회를 설치하지 아니하거나 운영하지 아니하는 경우 노인복지법에 따라 행정처분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시장은 사회복지사업법에 따라 시설의 장 교체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법률은 냉엄하고, 법을 집행하는 관청은 이렇게 무서운 곳이다. 만약 시설의 장을 강 대표가 아닌 현장의 다른 사람이 담당하였다면 시청의 타깃은 당연히 달랐을 것이고, 시행사 대표로서의 부담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그 직을 내려놓지 않았다. 자기가 아니라면 과연 누구에게 그 직을 맡기는 것이 좋을지 고뇌만 할 뿐 아직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확실히 강 대표가 나보다 더 실무에 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실 입주자가 미리 거기까지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젊은 사장이 생각보다 현안을 잘 파악하고 있군’ 나는 강 대표가 그렇게 세부적인 사항까지 파악하고 있으리라고는 미처 알지 못했다. 기업의 대표자이니 큰 줄기 위주로 챙기며 부하 직원들을 지휘하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만난 자리에서 ‘관리권을 입주민들에게 이양한다는 대원칙만 합의할 수 있다면 성공’이라는 큰 그림을 그리는 일만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건 택도 없는 나의 실수였다. 그는 이미 나의 기대치를 뛰어넘어 관리권 이양에 따르는 걸림돌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지 합당한 방안을 찾고 있었노라고 바로 내 앞에서 말하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강 대표를 상대로 협상을 계속하려면 기본적인 법령부터 잘 숙지해야 했다. ”회장님, 그 책임 없다는 것을 시청이 확인하고 인정해주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시청에 진즉 질의를 한 것 아니겠습니까. 입주민들에게 관리권을 이양하면 그때부터 우리가 관리책임을 더 이상 안 져도 되는 것 아니냐, 다시 말하면 시청은 우리에게 관리업무와 관련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면책을 인정해줄 수 있느냐 하고 말이죠. 근데 시청에서는 도무지 답이 없는 겁니다.“ 듣고 보니 강 대표 말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나는 법률 규정에 충실한 시청 공무원들이 강 대표가 요구하는 면책 보장 내용을 문서화할 가능성은 단 1%도 없다고 봤다. 거기에 도장을 찍는다는 것은 곧 미래에 대하여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기대를 하는 자체가 익히 잘 알려진 공무원의 생리를 무시하는 무리한 요구로 보였다. 그렇지만 오늘 강 대표와 대화를 하면서 각자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을 드러내 보여준 것은 큰 소득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강 대표가 관리권 이양 의사를 분명히 표시해줌으로써 이제 대립을 지양하고 상호 협력해야 할 중요한 전기가 마련된 것이다. 앞으로 우리 두 사람이 관리권 이양의 실현방안을 모색하기 위하여 같이 뛰고 협력할 필요가 있다는 데에 공감한 것은 더욱 고무적인 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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