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직을 딱 5년 앞두고 있던 해 말, 내년부터 임금피크 적용대상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열정을 가지고 챙기던 일들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순순히 일선에서 물러났다. 자리도 일반 직원들과 섞이지 않고, 고객과 접촉할 필요도 없는 별도의 방으로 배치되었다. 우리는 그런 새로운 사무공간을 편하게 뒷방이라고 불렀다. 이어서 법인카드를 반납했다. 거부할 명분도 없었다. 급여도 매년 지급률을 낮춰가며 사정없이 깎였다. 가슴 철렁한 일련의 과정은 마치 무장해제 당하는 포로처럼 무기력한 기분이었다. 머지않아 퇴직하면 월급 없는 삶이 과연 어떤 것일지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했다. 무의식 중에 입이 꽉 다물어졌다. 말년이 가까워질수록 노후대비를 자주 들먹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일말의 진전이 있었던 건 아니기에 착잡하고 씁쓸한 마음만 가득했다.
자격증이라도 따놓으면 좀 더 나을 것 같아 열심히 매달렸다. 성취감을 느끼며 차근차근 여섯 개를 취득하였다. 와우~ 그중 주택관리사 자격증으로 아파트 관리소장직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퇴직한 이듬해 초부터 매일 구인공고를 살펴보며 이메일로 이력서를 보내기 시작했다. 직접 찾아가서 인사도 드리며 구직활동을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도 했지만, 하나같이 업무에 방해된다며 전화도, 방문도 절대 사절 손사래를 쳤다. 구인공고 웹사이트를 들여다보던 초기에는 집에서 가까운 주택단지도 제법 많아 보여 설레는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미 소장으로 취업해서 매일같이 휘파람 불며 출퇴근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불러준 데는 단 한 곳도 없었다. 이럴 수가. 허탈하고 점점 초조해졌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해서는 취업하기 힘들다고 했다. 암암리에 돈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는 홀로 근거 없는 낙관을 하며 일반 시중의 관행과 동떨어진 전략을 쓰고 있었다.
정년퇴직을 2개월 앞두고 인근 신도시로 이사했다. 이제 막 입주가 시작된 노인복지주택을 웃돈 얹어주고 샀다. 외형은 아파트와 다름없어 보였다. 계약 전, 그런 유형의 집을 처음 접하는 나에게 중개업소에서는 60세 이상만 입주할 수 있는 주택이라고 설명해주었다. 생일까지 계산해보고 나서 나는 최연소 유자격자로 계약할 수 있었다. 직장생활 30년 동안 집 잘 사서 재미 본 적 없었는데, 이번에는 스마트폰을 한참 들여다보던 딸내미가 30분 만에 찾아준 제법 괜찮은 집이었다. 나의 30년 묵은 고민을 딸이 단 30분 만에 해결해버린 셈이다. 이사 후에도 이메일로 부지런히 관리소장직의 문을 두드렸다. 주택임대관리를 담당하는 직장 후배를 찾아가 부탁도 해봤다. 하지만 돌아서면 대부분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울타리 밖 세상의 냉혹하고 매정한 인심에 다시 한번 입을 꽉 다물어야 했다.
살다 보니 관리비가 턱없이 비싸다는 입주민 등의 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의 그치지 않는 불만에도 관리사무소 직원들은 어쩐 일인지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였다. 자초지종 설명도 없고 시정할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그렇게 나오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주택을 건축한 시행사가 주민 입주 전에 미리 선정하여 계약 체결한 주택관리업체 소속이었기 때문이다. 소위 그들이 충성하는 상전은 입주민들이 아니라 시행사라는 것이 빤히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입주민들은 관리소 직원들이 마치 식민지 통치하듯 군림한다고 비난하였다. 주인이 마땅히 주인행세를 하지 못하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다며 분통 터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왔다. 입주민들의 들끓는 불만의 소리에도 20년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급 관리소장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민들이 아무리 들고일어나도 소용없다며 뒤에서 코웃음만 치고 있었다. 법이 그렇다는 것이었다.
나는 새로 실시된 동대표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하고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직을 맡게 되었다. 가장 먼저 주택관리업무에 관한 분쟁과 대립을 풀기 위하여 시행사 대표에게 만나자고 연락하였다. 막말과 욕설로 밀어붙이던 전임자들의 행태에 넌더리가 난 그였지만, 새로 선출된 입주자대표회장이 먼저 정중하게 손을 내밀자 흔쾌히 응하고 나왔다. 내가 알고 있는 협상 지식과 스킬을 최대한 동원하였다. 수 차례 회담을 거듭하던 그해 연말쯤 그는 관리업무를 이양한다는 대원칙에 동의하였다. 이제부터 쌍방이 그런 방향으로 세부협상을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관리소장이 바뀌었다.
새로 부임하는 관리소장도 여자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후 상견례 겸 관리사무소를 찾았을 때 나는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서서 안경 낀 그녀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세상에, 이런 운명의 장난도 있단 말인가. 순간 30년도 더 지난 나의 총각 시절 추억이 떠올랐다. 맞선으로 만나 한동안 교제하다가 결혼할 뻔했던 바로 그 여인을 여기서 이렇게 만나다니. 당시 그녀는 국회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후 어떤 사정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나왔고 우여곡절 끝에 이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며 빛바랜 미소를 지었다. 웃어야 하나, 울어야 하나. 나는 그날도 집에 돌아와 이메일 구직활동을 잊지 않았다.
주택 관리권을 인수하기 위한 시행사 대표와의 협상은 예상과 다르게 난항을 거듭하며 거의 9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빌어먹을, 남북정상회담도 아닌 한낱 주택관리 문제를 가지고 이렇게까지 끌다니.’ 이게 과연 타결될 수 있을 것인지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다. 주민들은 일각에서 시행사가 빼먹을 게 많은데 그걸 쉽사리 내놓겠느냐며 비관적 예상을 서슴없이 내놓기도 하였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교착상태에서 시청 공무원을 끌어들여 다자협상으로 이어간 나의 선택은 주효했다. 시청의 중재로 시행사 측이 주택 관리권을 입주민들에게 이양한다는 데에 합의한 것이다. 시행사 대표는 나에게 주택관리업체를 새로 선정하더라도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고용을 승계해달라며 요구를 하나 더 붙였다. 요즘 같은 어려운 시기에 일터에서 쫓겨나면 다시 들어가기가 어렵지 않으냐며 꼭 지켜달라고 했다. 몇 달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서도 갑의 자리에 앉아있는 나의 처지가 우습게 느껴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출 제안이었지만 대승적으로 수용하였다. 닥쳐올 변화 앞에 마음 심란할 그녀의 자리도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협상은 끝났다. 관리권을 가져오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던 주변의 회의적, 비관적 전망을 놀라움과 찬사로 바꿔놓은 것이다. 그날도 나는 밤늦도록 구인정보를 검색하고 이력서를 전송하였다. 언젠가 인연이 닿는 곳이 있을것이라는 신념을 포기할 수 없었다.
동대표 중 경찰 수사관 출신인 오감사가 입주민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을 들었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이제 관리권이 우리한테 넘어오면 동대표들이 군포에서 관리소장으로 일하고 있는 7동 입주민 김 씨를 우리 단지 관리소장으로 앉히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건 또 무슨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인가. 터무니없는 낭설이었다. 사실 몇 달 전 내가 그에게 관리소장 자리를 알선해달라고 부탁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눈치 없이 돈을 집어주지 않아서인지 그는 전혀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기대를 접고 포기했고 그와 연락을 끊은 지 오래다. 그러던 사에 이 사람이 누군가와 함께 공작을 꾸미고 있다는 낌새였다. 무척 불쾌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었다. 거의 1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일자리도 구하지 못한 채 누구보다 앞장서 주권회복에 매진해왔는데 자칫 죽 쒀서 개줄 수도 있겠다는 불안감이 일기 시작했다. 생긴 대로 논다고 해야 하나. 세상이 난장판 게임장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덩달아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마이 웨이(My way), 인생 2막을 여는 길이 다소 멀게 느껴질지라도 내 방식대로 가기로 했다. 그건 내가 인생에 기대하기보다는 인생이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