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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Dec 19. 2022

토요일의 도피

아내와 딸 사이에서 정신병자처럼 헤맨 주말

   토요일 아침, 눈을 떴을 때 7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갑갑하고 언짢고 찝찝했다. 어젯밤 저녁을 먹고 나서 아내가 고래고래 큰소리 지르며 나에게 역정을 낸 여운가시지 않은 때문이다. 얼마 전, 딸내미와 전화로, 문자로 험한 말을 주고받으며 심하게 싸우고 난 여진이었다. 흔히 그렇듯, 아주 사소한 일이 발단이었다. 딸은 큰아이 아들과 함께 서울 집에서 따로 산다. 아직 결혼도 하지 않은 자식들을 그렇게 미리 내보낸 건 여러 가지 사정을 감안한 고육지책이었다. 아들은 직장과 좀 더 가까운 곳으로 가고자 했고, 딸도 비슷한 이유에다가 그 참에 집을 나가 차차 독립하겠다는 당찬 각오로 묻어나갔다. 벌써 3년째다.



   딸랑 단둘이 남아 각자 방을 쓰는 우리는 아침저녁 주로 밥시간에 같이 앉아 먹고 이야기하다가 별일 없으면 자기 방으로 돌아가곤 한다. 그런 생활이 벌써 한두 해가 아니지만, 날이 갈수록 서로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떨어지고 감정도 무미건조한 상태로 바짝 메말라가는 느낌이다. 그러다가도 올리비아는 무슨 불편하거나 속상한 일만 생기면 그때마다 온갖 악담을 나에게 퍼붓듯 쏟아내기 일쑤다. 그럴  나는 아무거나 갖다 버리는 쓰레기통이 된 기분이다. 그런 소리일랑 듣고 싶지 않다고 해도, 제발 하지 말라고 짜증을 내도 아랑곳하지 않는 왕고집 마누라다.



   대개 그 연유를 모르는 나는 '일단 들어보라'며 야단치듯 요구하는 아내의 불호령 같은 에 이내 주눅이 들고 만다. 나는 그저 무슨 소린가 하고 눈만 멀뚱멀뚱하고 그녀의 다부진 입에 주목하며 다소곳히 들어줘야 한다. 무슨 말이 됐건 간에 나에게 먼저 이해시키고(사연인즉슨 이런 얘기란 말야!) 그런 다음 신나게 맞장구를 쳐달라(맞아. 당신 말이 맞아!)는 주문이라는 걸 나는 익히 잘 안다. 자기편이 돼달라는 뜻이다. 세상에 자기편 되어줄 사람은 오로지 나, 남편밖에 없다는 외마디 호소 같기도 하다.




   이번에도 그랬다. 내가 반론이나 반격을 가틈은 전혀 허락하지 않았다. 확신에 찬 얼굴로 그저 들어보라며 단칼로 내리치듯 다그쳤다. "내 말 들어봐!" 나는 영락없는 고양이 앞에 쥐가 신세였다. 답답해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어젯밤에도 난 데 없이 딸 이야기를 꺼내더니 나를 주시하며 큰소리를 쳤다. 잔뜩 화가 치밀어올라 욕설까지 섞어가며 미운 정을 거칠고 거침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급기야 분을 삭이지 못하는 표정으로 실컷 말폭탄을 쏟아내고서는 후딱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똑딱 잠가버렸다. 불덩이 같은 말이 쏟아지던 거실에 갑자기 차가운 적막이 감돌았다. 별안간 나만 혼자 덩그마니 내동댕이치듯 그 자리에 남겨졌다. 전쟁이나 다툼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인 나는 그대로 남아 지긋히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대체 왜 그러는 걸까? 뭐가 문제란 말인가? 같이 살아온 날들이 얼만데, 앞으로도 늙어 죽도록 변함없이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괴로웠다.  이렇게 밖에 못 사나.ㅠㅠ.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결혼 전의 환상은 초기에 일찌감치 사라진 옛이야기다. 그래도 노력하면 소박한 삶을 일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버리지 않고 살아왔건만... 안타까움과 회한이 화석처럼 마음 한구석에 박혀있다. 이제 남은 여생 제발, 제발 조용히 살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내는 직접적으로는 딸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다. 지금쯤이면 잊어버려도 되련만, 일주일도 더 지나도록 그 후유증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집안에 가득한 불안한 기운이 도무지 걷힐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였다. 마치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끓으며 분을 참지 못하고 애꿎은 나에게만 말로, 문자로 생각날 때마다 화살을 겨누었다. 엄마가 자식한테서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하냐며 속상하고 억울해 혼자 난리다. 엄마가 돼가지고 그러냐고 면박을 주고 싶지만, 그렇게 되받으면 더 험악해질 게 뻔해서 나는 입만 길게 내밀다 말기를 여러 번이다.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남편만큼은 자신의 그런 기분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공감해주리라 기대했는데 도대체 일언반구 호응이 없으니 더더욱 화가 난 모양이다. 엄마한테 감히 버르장머리 없이 구는 자식을 당장 데려와서 잘못했다며 무릎 꿇고 빌도록 엄하게 나무라지는 않고 오히려 두둔하며 감싸고도는 내가 그렇게도 미워 보였나 보다. 정말 딸이 미워서라기보다 사랑하기 때문에 더 몸서리치는 깊은 속을 몰라주는 내가 한없이 바보 같고 야속하고 원망스러워 타박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 남편이라는 작자가 더 꼴 보기 싫고 그래서 더 분한 이다. 아내가 외로워 보였다. 올리비아의 그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 더욱 짠한 생각이 들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당신 이제 어쩔 거냐고 나에게 삿대질하는 것만 같았다.



   그토록 머리가 복잡한데 주말 아침 아무 일 없다는 듯 한가하게 잠자리에 누워만 있을 수가 없었다. 당장에 박차고 일어나 기동을 시작하였다. 세수하고 생수에 갑상선 약을 챙겨 먹고서 살며시 문을 열어 빼꼼히 거실을 내다봤다. 아직 아무런 움직임도 없고 어젯밤에 끈 전등그대로인 채 불안한 아침이 거실을 천천히 밝히고 있었다. 7시가 훨씬 지났는데 올리비아는 자는지 일어났는지 문간방에서 아무런 기척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일어나면 곧바로 '크~아악'하고 가래를 물고 나오는 그 사람인여태껏 아무런 기색이 없었다. 진즉 일어나고서도 내가 뭐 이쁘다고 나와서 아침 차려주나 하고 삐대며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기도 하였다. 나는 문을 열고 고양이 발걸음으로 살살 걸어 나갔다. 여느 때처럼 냉장고에서 플레인 요구르트를 하나 집어 들고 거기에 견과류를 말아먹었다. 아내가 플라스틱 통에 담아놓은 반쪽짜리 사과도 꺼내 먹었다. 그렇게 나 홀로 식탁에 앉아 조용히 아침을 때워버렸다.




   주방에 멋대로 쌓인 그릇들을 하나씩 차근차근 씻으며 깔끔하게 설거지를 마쳤다. 기왕이면 비뚤어진 아내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 줄 수 있는 일부터 해치우기로 한 것이다. 이따금 그릇 부딪치는 소리가 찌그덕하고 났지만, 그럼에도 아내 방에서는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화장실 문 앞에 내놓은 양말이 며칠째 방치돼있는 걸 보고 소리 나지 않게 슬리퍼를 신고 들어가 앉았다. 조막 탱이만 하게 작아진 빨랫비누를 손에 쥐고 한참 빨래판에 문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뭐도요?" 하고 아내가 말했다. "아이, 깜짝이야!" 나는 아내가 나에게 던진 그 한마디가 과연 어떤 기분에서 나온 것인지 몹시 궁금하였다. 그에 상응하는 맞대응 처방전을 신속하게 만들어내야 했다. 내 머릿속은 올리비아의 기분이 어떤 상태인지 그 내막을 파악하고자 재빠르게 분석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래, 말속에 약간의 웃음기가 섞여있는 것 같았어. 다행이구만.

목소리가 비정상적으로 높거나 화가 묻어있지도 않았지. 분명해.

조금은 따스한 느낌도 섞여있는 것 같아. 맞아.

이 정도면 됐어!' 모드(Mode) 밝음!!


"여보, 잘 잤소...?" 아내는 내 옆 빨래 바구니에 손을 뻗으며 안경닦이는 나중에 해도 된다고 따로 빼놨다. 나는 그럴 것 없다며 다시 가져다가 마저 빨아버렸다. 아내가 씩 웃었다. '아이고, 저 웬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맹숭맹숭하게 올리비아의 낯을 건너다보았다.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식탁으로 다가오는 나를 바라보며 올리비아가 아침은 먹었냐고 말을 걸었다. 그리고 어찌 알았는지 나가려면 빨리 갔다가 집에 일찍 들어오라고 채근하였다. 아마도 아들 녀석과 문자 교신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되었다. 그러다 곧바로 말을 수정하였다. "아니, 그러지 말고, 애들 집에 가서 자고 내일 오쑈!" 그러고서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1박할 생각으로 조용히 짐을 챙겼다. 아내가 그렇게 말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칫솔, 충전기, 수건, 잠옷, 그리고 갑상선 약, 고지혈증 약, 전립선 약, 오메가 3, 예비용 마스크와 약간의 티슈까지 이미 머릿속으로 챙기던 준비물들을 차근차근 가방에 주워 담았다. 마지막으로 옷도 외출복으로 신속하게 갈아입었다. 아내 몰래 휙 나가버려야겠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더 급해졌다. 내가 나가는 걸 눈치채지 못하도록 살금살금 아내 방문 앞을 지나 현관으로 갔다. 저만치 있는 장화 구두를 당겨서 최대한 소리 안 나게 신고서는 부리나케 집을 나섰다. 휴~~~. 밖은 찬 바람이 불고 강추위의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아차, 목도리를 놓고 나왔다. 그뿐이 아니었다. 귀도리와 장갑도 안 가지고 나왔다. 하지만, 그거 가지러 다시 대문 열고 집에 기어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그냥 가자. 마음은 벌써 엄마와 신경전 벌이며 한 달째 집에도 못 오고 있는 딸내미 생각으로 가득했다. 마른 눈물이 핑 돌았다.  녀석...! 성질이 엄마를 닮은 딸도, 그 딸의 엄마인 아내도 어쩌면 각자 자신과 다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터벅터벅 지하철에 올라탔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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