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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Sep 17. 2022

명절 전의 길고 긴 호흡  

내가 겪는 명절 증후군

   무릇 달력에 추석이 면 내 마음은 성능 좋은 반도체가 작동하듯 긴장한다. 추석만이 아니다. 한겨울에 맞이하는 설이 다가올 때도 또한 그렇다. 대명절 때마다 되풀이되는 나의 벙어리 냉가슴은 올해도 예외가 아니다. 결혼 후 생겨나  나이 60 중반에 이른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적이고 질긴 증후군이다. 죽는 순간까지 끝내 해소하지 못할 스트레스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홀로 안절부절못하는 내 마음의 한가운데에는 언제나 어머니가 있다. 아니, 엄마가 아니라 아내가 있다.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와 평소 떨어져 살지라도 명절 때만은 집으로 모셔와 같이 쇠고자 하는 게 오래된 나의 마음이다. 아내에게 그 말을 하고, 그러자고 명쾌한 대답을 받아내야 하는데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불안하다. 억지를 쓰거나 우격다짐하는 등 밀어붙여서 될 일이 아니다. 눈치코치와 오감을 넘어 육감까지 온갖 감각과 감정을 동원해도 될까 말까 하는 대사(大事)다. 누구도 감정 상하는 일 없이 모두가 웃으며 밝은 모습으로 명절을 보내기 위해서는 이번만큼은 정말 그 어느 때보다 치밀하고 세심하며 매끄러운 어프로치(approach)가 필요했다.




   남녘 고향에 계신 엄마는 혼자여서 외롭고 쓸쓸하다. 연로한 나이에 하루하루가 더해질수록 사무친 마음은 그림자 마냥 더 커져만 다. 아련한 그 옛날, 힘들어도 고단한 줄 모르고 한바탕 화려한 축제처럼 치렀던 명절을 생각하면, 어머니에게 요즘의 세태는 차라리 서럽고 서글픈 날들이다. 힘들어도 온 가족이 한 데 모이던 그 시절이 낭만주의 시대였다면, 제각각 흩어져 모이기도 힘들어진 지금은 확실히 염세주의적이거나 혹은 허무주의이름 붙여야  판이다. 자식들과 한자리에 모여 오손도손 사랑과 정을 나누고 싶지만, 벌써 오래전에 끊어진 추억일 뿐이다. 명절이 코앞에 다가올수록 불안기분이 서서히 돋아나는 이유다. 오시라거나, 모시러 가겠다거나 그런 말을 일찌감치 들었으면 좋으련만, 이번에는 또 자식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몰 속이 타들어간다. 엄마의 그런 심정을  알면서도 이럴 때마다 양립하는 조화를 쉽사리 이뤄내지 못했기에 나는 괴로웠다. 자식들 집집마다의 사정을 빤히 잘 알고 있는 엄마는 혹시나 당신 때문에 불화가 생길까 봐 이미 기대를 접은 지 오래다. 과거의 설렘은 진작에 사라지고 없다. 먼 데서 그저 자식들 눈치만 살피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전락한 엄마의 처지는 그래서 더 안쓰럽고 짠다. 그런 기다림과 불안은 이제 엄마의 스트레스가 되어버리않았을까 싶다.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나같이 엄마 걱정하면서도 지금처럼 결정적 순간이 닥치면, 넷이나 되는 동생들마저도 이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입을 꼭 다물어버린다. '어머니, 우리 집으로 오세요' 하며 누군가 나서 주기를 은근히 바랬건만 아무도 말이 없고 싸늘하기만 하다. 그런 아이들이 아니었는데, 여태 보지 못했던 태도들이다. 섭섭하고 괘씸한 생각이 들지만, 나는 어떤가 하고 돌아보면 그런 그들을 나무랄 수만은 없다. 오히려 별 상상을 다 해보게 된다. 뭐니 뭐니 해도 어머니는 장형이 모셔야 해. 동생들이 나서면 장형 집에서는 아예 손을 놔버릴지도 몰라. 동생들이 마땅히 할 수도 있지만, 섣불리 아무나 나서면 안 돼. 그래야 장형이 별 수 없이 나설 거야. 장형이 나서게 하려면 아프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강수를 써야 해. 동생들이 연합하여 때론 무정하게, 때론 매정하고 가열차게 무언의 압박을 가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그렇게 나오는 것은 다만 동생들만의 순수한 의도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각자 그들 옆에 버티고 있는 제수씨들의 입김과 거부감이 작용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나한테 가하는 압박은 곧 큰형수에게 수용을 촉구하는 메시지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내가 아내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지조차도 확실치 않다. 연세가 들만큼 든 시어머니를 생각하고 이미 측은지심(惻隱之心)을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긋하게 나이가 든 만큼 더 성숙해지고 곰삭은 깨달음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뜨겁고 치열했던 과거 우리 두 사람의 그림자만을 생각하고 있는 내가 오히려 고정관념에 얽매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 젊었을 때 실컷 미워하고 증오했던 우리다. 내가 정년퇴직을 하고 둘 다 환갑을 지나고나서부터는 서로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히 달라졌다. 붉은 태양이 만치 서녘에 가라앉을 즈음에 찬란하게 펼쳐지는 황혼을 떠올렸던 것일까. 그때서 비로소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역력함을 우리는 자주 느끼게 되었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서로 붙잡아줄 수 있는 유일하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말하지 않아도 깨달음으로 잘 알게 되었다. 우리 두 사람의 그런 변화된 모습은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가 없었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우리의 사랑은 가히 철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할만하다. 어느 때보다 관대해지고 포용력이 커졌기에 이번에는 예전에 볼 수 없었던 이심전심(以心傳心)이 통할 것 같은 예감들었다. 왠지 잘 될 것 같은 희망과 기대감이 커졌다.




   2022.8.5일 우리나라가 국내 기술로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달 탐사선 다누리호 발사에 성공하였다는 뉴스를 봤다. 정말, 정말로 대단한 코리아(Korea)다! 지구에서 달을 향해 탐사선을 성공적으로 쏘아 올리기까지는 그동안 무수한 시행착오와 도전의 역사가 뒤에 쌓여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이뤄낸 그 기념비적인 순간을 TV 화면으로 지켜보며 가슴이 뭉클하였다. 저 어마어마한 일을 해내기까지 매달린 사람들의 온갖 정성과 굴하지 않은 노력에 박수를 쳤다. 성공의 순간을 향한 그들의 정교하고 치밀한 준비와 대처 과정이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 나는 특히 주목하였다. 주변에 굳이 마찰이나 파열음을 내지 않고도 얽힌 문제를 스무스하게 풀어내기 위한 수완과 스킬(skill)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 말까지 하계휴가를 마치자며 직원들에게 말해놓았지만, 정작 나는 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저런 일들로 인하여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직원들이 모두 휴가를 마친 다음 마지막 차로 가야겠다고 생각을 정리하였다. 재취업한 일자리에서 맞이하는 휴가는 과거 직장생활 시절에 누렸던 후련한 기분과는 사뭇 다르게 느껴졌다.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찝찝한 느낌이 드는 건 대체 뭔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관리사무소 일이란 게 그런 건가 보다 하고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하였다. 그런 가운데 나는 출퇴근 시 틈이 날 때마다 아내에게 추석 얘기를 한 마디씩 건넸다.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그냥 툭 던져놓고 가는 식이었다.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마치 잽을 던지듯 가볍게 말을 건네 놓으면, 자연스럽게 나의 말을 되새김질하듯 생각해 보고 이해하리라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당초 마음먹은 대로 이번 여름휴가는 고향으로 가기로 하고 휴가원을 냈다. 어머니를 찾아뵙고 아버지 산소도 둘러볼 생각이었다. 며칠 뒤 5형제 단톡방이 갑자기 뜨거웠다. 엄마가 가끔 가슴이 답답해한다며 온통 걱정하동생들의 문자로 들끓고 있었다. 카톡방을 열자마자 내 가슴이 철렁했다. 셋째가 다급했던지 곧바로 나에게 개인 톡을 보내왔다. 고향에서 병원 원장으로 일하는 내 친구가 어머니 상황이 급하다고 했다는 것이었다.


"장형!

아침에 어머니 통화하는데

어제도 오늘도 가슴 압박이 심하게 오는데 참고 계시는 것 같네요.

연합의원 원장의 진료를 받았는데 원장이 아들에게 얘기하라고 했다는군요.

엄마는 원장더러 형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어머니는 자식들 걱정 안 주려고 말을 안 하려고만 하니 장형이 병원장과 통화해서 증세를 알아보는 게 좋겠어요."


휴가를 떠나기 전날, 아내가 차려준 아침 식사를 하면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나의 본심을 전했다. "아무래도 내일 시골에 내려가서 엄마를 모시고 와야겠어. 엄마가 많이 아프대..."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더 이상 주저하거나 지체할 수는 없었다. 아내에게 그렇게 말하는 순간, 나의 눈시울이 뜨거웠고, 목소리는 약간 울먹이며 떨렸다. 일부러 쇼(show) 아닌 쇼를 하였다. 그러면서도 나는 아내가 어떻게 나올지 몰라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아이고, 어찌까! 돌아가시더라도 아프지는 말아야 할 텐데... 여보, 가서 모시고 와요."




   달력을 넘기며 추석을 의식하기 시작한 이후 거의 한 달 가까이 숙고를 거듭하던 숙제가 로켓처럼 튀어나온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끝이 나버렸다. 성공이었다. 이번 추석에는 아내도 잡고, 어머니도 챙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말없이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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