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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Aug 01. 2022

아내 없이 나 홀로 집에 있는 시간

뒤늦은 사랑의 발견

   목요일 저녁, 맛있는 감자된장국에 밥을 먹던 중 아내가 나에게 말했다. "내일은 구로에 가서 아이들 이불 빨래 좀 해줘야겠어. 이불에서 퀴퀴한 냄새가 난다고 그러네?" 그러면서 다음날 나의 도시락과 저녁밥을 걱정하였다. 도시락은 싸줄 테니 저녁은 밖에서 해결하고 오라고 했다.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잘 갔다 와." 아내 올리비아가 어디 간다고 하면 나는 언제나 대환영이다. 나만의 온전한 시간을 즐길 수 있겠다는 기대감이 그 말만 듣고도 벌써 머릿속에 가득 차기 때문이다. 갑자기 생긴 이 절호의 찬스를 어떻게 알차게 쓸 것인지 내 가슴은 설렌다.^^ 내 걱정일랑 하지 말래도 꼭 밥을 어떻게 해결하라고 또박또박 말하는 아내의 마음을 나는 오히려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나 혼자 두고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비우게 되니 밥을 챙겨주지 못해 정말로 미안하다는 양심의 발로일까. 아니면 내가 어떻게 나오나 보자 하고 빈말로 던져보는 걸까. 어떤 경우든 마님(ㅋ~)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절대 허튼짓하지 말라는 점검과 단두리 작업이라는 걸 나는 잘 안다. 허튼짓이란, 말도 없이 어디 가서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이나 마시지 말라는 뜻이다.




   약 3년 전 가을, 구로동에 아들 집을 샀다. 지하철 역이 가까운 정남향 소형 아파트다. 직장이 있는 여의도로 출퇴근하는 아들이 입사 후 2년간 신길동, 염창동 오피스텔을 전전하는 모습을 지켜본 끝에 안쓰러워 내린 결단이었다. 아이들이 살아보기 전에는 외관이 번듯한 오피스텔의 주거환경이 그토록 열악한 줄은 미처 몰랐다. 아이들은 특히 층간소음이 가장 불편하고 고통스러웠다고 두고두고 말했다. 손바닥 만한 공간에 불가피 딸이 합류하면서 고민은 더 커졌다. 구로동 집은 우리 집 네 식구가 벼락같은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붙잡은 유쾌한 결과물이었다. 집값은 자꾸 오르고, 주택청약에 넣어봐야 도저히 가능성이 없다고 봤다. 오래전, 내가 아이들에게 하나씩 만들어준 청약통장을 써먹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딸은 콧구멍을 발씬거리며 이러다가는 오빠가 서울에 집 마련할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하였다. 내가 결심 한 것은 딸의 그 말이 결정적이었다.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해서 어엿한 직장인이 된 아들의 신용을 가장 큰 밑천으로 삼아 결행하기로 하였다.




   여의도 접근성이 양호한 곳에 최대한 싸고 좋은 집을 찾는 것이 목표였다. 그것은 신기할 정도로 부동산을 보는 안목과 촉이 탁월한 딸이 맡았다. 스마트폰으로 점을 찍으면 그곳으로 직접 달려가 물건을 살펴보는 임장활동은 전적으로 아내의 몫이었다. 나는 그때그때 아내와 의논해 결정을 내려주는 상황실장 역할을 담당하였다. 아들은 직장의 주택자금 지원제도와 은행의 각종 대출조건을 알아보는데 주력하였다. 거래를 결정짓는 최후의 , 나는 아내와 간단하고 긴밀한 전략을 최종 점검하 같이 중개사무소갔다. 협상을 즐기는 나는 끝자릿수 5천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며 중개사를 집요하게 설득하였고, 기필코 100만 원을 빼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을 수 있었다! "정남향 로열층 소형 아파트는 씨가 말라버리고 없다"던 복덕방 아저씨의 단호한 입모습은 우리 가족의 추억 속에 재미있는 한 장면으로 저장되어 있다. 그렇게 마련한 아들의 생애 최초의 집. 나는 모처럼 아내와 뜻이 맞아 손발을 척척 맞추며 만들어낸 작품이라는 점이 무엇보다 반갑고 기뻤다. 엇박자만 치며 살아온 우리 사이에 보기 좋은 하모니가 이뤄졌고, 미래를 향한 강력한 희망의 증거가 만들어졌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도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쾌거였다. 규모가 작고 아담해서 나는 집을 이름하여 '구로 콘도'라고 불렀다. 나의 재치있는 작명에 아내도, 아이들도 다 좋아했다.^^ 금요일에 출발한 아내는 볼 일을 마친 후 일요일을 아이들과 같이 보내자며 구로로 오라고 했다.




   토요일 아침, 마치 아무것도 쓰지 않은 백지장처럼 온전한 나만의 시간이 찾아왔다. 아내가 없는 고요한 시간이 주는 기분은 이토록 편안하고 달콤하다.^^ 가만,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써먹을까. 당초 고교 동창 산악회랑 청계산에 갈 생각이었는데, 날이 너무 덥다며 아내가 극구 말리는 바람에 일찌감치 포기하였다. 시간 되면 전화 달라던 절친 백형(兄)에게 연락하여  강남역에서 만나 점심에 막걸리나 한잔 할까. 옆 동에 사는 김 선배와 골프 잘 치는 채(蔡) 프로랑 셋이 함께 어울리는 삼합(三合) 모임 하자며 신봉동 먹자촌에 가자고 할까. 대학동창 3인방 이름자 하나씩을 따 만든 '돈만채'를 하자 할까. 아니면, 고향 친구 모임 '금정아이돌'에 벙개를 쳐볼까. 코로나다 뭐다 해서 한동안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 여럿 떠올랐다.




   올리비아가 미리 해놓은 밥으로 혼자 아침을 차려 먹고 간단히 설거지를 하였다. 손을 씻으러 화장실에 갔다가 안방에 벗어놓은 내 양말이 생각나 얼른 가져다가 비누칠을 하고 빨래판에 주물러 빨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내가 한쪽에 귀퉁이에 모아둔 약간의 빨랫감이 눈에 띄었다. 기왕 하는 김에 당연히 같이 빨아야겠다고 생각하였다. 큼직한 플라스틱 함지박에 바지와 속옷가지를 각각 나눠 담그고 세제를 풀어놓았다. 15분 정도 후에 손으로 주무르고 문지르기를 반복하며 더 이상 거품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하며 빨래를 마쳤다. 건조대에 빨래를 널다가 수건과 셔츠 등 이미 마른 옷들을 걷어서 관물 정돈하듯 반듯반듯하게 갠 다음, 각각의 서랍장에다 가지런히 넣었다. 이것저것 집안일을 하다 보니 벌써 시간이 상당히 지나가버렸다. 밖에 나갈 생각을 접기로 하였다. 오늘 하루는 차라리 정비의 날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왕년에 아버지도 집에 계시는 날이면, 온갖 정리하고 청소하느라 한 시도 가만히 계시지 못했다. 그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은 나 역시 집에 있는 동안에는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정리정돈을 하든, 책을 읽든, 글을 쓰든, 아니면 그림을 그리든 할 일은 언제나 산적해 있는 기분이다.




   빨래하고, 널고, 개서 집어넣기, 설거지 하기, 청소 등 집에서 하는 온갖 정비는 어느 것 하나 올리비아와 관련되지 않은 일이 없다. 빨래를 하고 건조대에 널 때는 물론, 이미 마른 빨래를 거둬서 각지게 개고, 장에 넣는 순간까지 나는 줄곧 아내와 아내의 손길을 생각하였다. 설거지를 하는 동안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정리하고 다잡는 쓸만한 기회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하기 싫은 일이라는 아내의 말이 떠오르는 순간 나는 비시시 웃으며 정리의 즐거움을 새삼 확인한다. '이게 뭐 힘들다고...ㅎㅎㅎ.' 그 시간, 구로 콘도에서 부지런히 아이들 이불 빨래하고 있을 아내를 생각하니 고마움과 뿌듯함, 그리고 사랑이 느껴졌다. 서로에게 거칠고 다정다감하지 못한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은 너무나 목석같고 특별해서 굳이 그려보자면, 마치 밤송이 속에 담긴 왕밤 두 알 같지 않을까 싶다.ㅋ 집에 같이 있을 때는 항상 나를 가만두지 않고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며 귀찮게 하는 아내에게 때론 역정 내고 뿌리치기도 했다. 그 사람이 오늘처럼 떨어져서 저만치 가있으니 편안하다고 우쭐대던 나의 기고만장은 잠시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올리비아가 일시적으로 자리를 비운 시간에 내가 고요함과 편안함을 느끼는 이기적인 생각은 어쩌면 표면적일 뿐, 속 깊은 진심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친구들끼리 어울리러 나들이를 가든, 아이들 집에 가든, 처형과 처제 만나러 가든 아내가 어디에선가 그렇게 즐겁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곧 내가 더불어 편안하고 즐거울 수 있는 이유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엄청난 깨우침이다! 그렇지. 아내가 없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올리비아가 아이들 집에 간 사이 어쩌다 나의 삶, 우리의 삶을 오늘 이렇게 돌아보게 되었다. 그토록 다투고 신경전 벌이며 숱하게 만들어낸 소음들이 모두가 사랑에 목말라 울부짖었던 외마디 몸부림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불협화음과 파열음이 빈번했던 것은 아집과 외곬에 빠진 내가 아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근거 없는 자존심만 내세우며 외면하고 살았던 데 기인한 것이었다.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반기며 보낸 오늘 하루, 이 절호의 찬스는 내면에 침잠한 사색의 시간으로 새겨둬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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