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쉐비 Jul 28. 2022

아내의 고백

그러나, 신경전은 계속된다.

   "여보, 이혼 안 해줘서 고마워~!" 아마도 작년이었을 것이다.  아내가 거실 식탁에 앉아있던 나에게 갑자기 고백하듯 했던 말이다. '아니, 천하의 올리비아가 어떻게 이런 말을.., 이봐, 진심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말이어서 라웠. 물론 반가웠고 순간적인 승리감에 취해 기분은 째질 듯 좋았다.^^ 나는 그런 감정을 일부러 누른 채 아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이냐고 되묻는 내 말에 과연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올리비아는 자신이 뱉어놓은 말이 쑥스러웠던지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참을 인(忍) 글자를 백 번도 더 썼을 정도로 참고 또 참으며 살아온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쨌든 평소 아내가 하는 식으로 말하자면, 살다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겼다. 내가 정년퇴직한 지 3년 만의 일이었다. 30년 장미전쟁보다 더 오랫동안 지속된 입씨름과 자존심 싸움에 마침내 종지부를 찍는가 싶어 나는 반색하였다.ㅋ




   냉정하게 해석하자면, 아내가 백기를 든 일대 사건이라 할 만하다. 같이 살을 맞대고 살기 시작한 이래 지난 34년간, 나를 대하던 태도나 말투를 생각해보면, 결코 그런 말을 함부로 할 사람이 아니다. 어떤 것이든 마음속에 생각이 떠오르면 절대 그대로 속에 담아두지 못하는 성격이기는 하다.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되고 때론 불만스럽기도 한 개성이다. 좀처럼 생각을 밖으로 표출하지 않는 나의 신중한 성향과는 정반대였다. 모든 것이 직접적이고 즉각적이어서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ㅋ "오메, 견과류가 다 떨어졌네. 이따 농민마트에 가서 더 사놔야겠구나" 냉장고 문을 열어보며 이처럼 혼잣말을 하는 식이다. 한 번은 그것 참 이상한 습관이라고 생각하고, 궁금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당신은 무엇이든 생각이 떠오르면 그것을 속에 담아두는 법이 없이 모두 그대로 입 밖으로 꺼내어 말로 하더라고? 생각은 대부분 속에 담아두고 필요한 말만 하는 거 아니야?" 아내의 답은 너무나 간단명료했다. "나는 다 말로 해야 씨언해" '통일은 도둑같이 온다더니, 우리 사이의 담도 전혀 생각지 못한 순간에 이렇게 터무니없이 무너지고 마는군 그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찌 된 일인지 결혼반지를 담은 작은 유리상자를 지키는 일은 언제나 나의 몫이었다. 신혼 때, 아내를 기선 제압하려면 강하게 나가야 한다고 누군가의 조언을 들었던 것 같은데, 나는 아마도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실패했던 것 같다. 내가 대찬 사나이라면 그 말대로 판이 깨지든 말든 배짱 좋게 큰소리치며 살았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타고난 성품이 그런 것과는 근본적으로 거리가 먼 순둥이였다. 일단 시작하고 이룬 것은 끝까지 가려는 일관성을 중시했고, 내가 선택한 일에 대한 책임감 또한 크게 느꼈다. 애니어그램으로 분석해본 나는 - 결과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 영락없는 평화주의자로 나왔다.^^ 겉으로는 아닌 척하고 강대 강으로 대치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부부관계라는 보석상자에 행여나 금이 가거나 혹은 와장창 깨질까 봐 무척 염려하는 쪽은 - 그때는 절대 드러내지 않았고,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 아내보다는 오히려 나였다. '내가 이긴 들 마음이 편할까. 내가 참고 말자.ㅎㅎㅎ' 불화가 생기면 아내는 늘 창을 들었고, 나는 탄탄한 방패를 둘러치고 방어태세에 돌입해야 했다. 숱하게 벌였던 말다툼 끝에 "우리 그만 끝내!"자고 파국을 말한 쪽은 언제나 올리비아였다. 그 파괴적 영향과 파장을 충분히 상상하고도 남을 만큼 사려 깊은 A형인 나는 감히 그런 말은 고사하고 마음조차 먹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저 사람은 어찌 서로 갈려버리자는 말을 저렇게도 쉽게 뱉어버리는 걸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며 나 혼자 괴로워했다. 우아하고 듣기 좋은 말로 평화주의자이지 시체말로는 완전히 쫌팽이로 살았다고 해야 보다 솔직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 처지에 놓인 나를 위로해 준 사람은 500년 전 이탈리아의 정치사상가 니꼴로 마키아벨리(Niccolo Machiavelli, 1469~1527)였다. "약한 자가 자신을 높이는 것은 허풍이고, 약한 자가 자신을 낮추는 것은 비굴이다. 강한 자가 자신을 높이는 것은 거만이고, 강한 자가 자신을 낮추는 것은 겸손이다. 겸손은 강한 자의 특권이다." 똑같이 대항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내 앞에서 겸손했다고 확신한다.ㅋ




   관리소장으로 일을 나가기 시작한 이후로 어떻게 하면 주말을 잘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항상 문제였다. 평일은 일을 해야 하니 그 이틀은 금쪽같은 시간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친구들 만나거나 기타 이러저러한 모임에 나갈 일이 많아 일정을 조절하고 배분해야 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현직에 종사할 때보다 제2막을 시작한 이래 만나자는 친구들이 여기저기 더 많아져서 보람과 즐거움이 크다. 아마도 가급적 적을 만들지 않고 동글동글하게 살아온 내 행적의 결실이 아닌가 싶다.아내는 그런 나의 사정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이틀간 나와 함께 할까 하고 독자적인 궁리에 몰두하기 일쑤다. 나는 그냥 아무렇게나 갖다 쓰면 되는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자기 혼자 멋대로 계획하고 생각하며 그림을 그리것이다. 대체 뭘 그려서 나한테 내밀려고 그러는지 속셈을 몰라 불안할 때가 많다. 가시가 날카로운 선인장처럼 다가서기가 쉽지 않은 - 평소 내가 그렇게 놀려대곤 한다 - 아내는 친구들과 어울리는 일이 많지 않은 편이다. 맨날 나를 붙잡고 놀 생각만 하는 것 같아 죽을 지경이다. "Please, set me free!" 내가 아는 한 우리 집은 부부가 사는 모양이 완전히 남들과는 반대인 것 같다. 주말에 같이 할 일이 있다면, 주말이 오기 전에 미리미리 상의하고 확정해두는 것이 편하고 상식적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누구도 먼저 그런 얘기를 꺼내지 않는다. 미리서부터 꽉 잡혀 제약받고 싶지 않다는 뻔한 속내 때문이다. 빠르면 금요일 밤, 아니면 휴일 아침이 도래하도록 바짝 닥쳐서야 각자 자기 일정을 불쑥 꺼내기 일쑤다. 어떻게든 스케줄을 통보하고 허락받기 위한 통과의례는 차마 생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대부분 혼자 밖으로 나가는 일이고, 아내는 나를 끌고 어디론가 같이 가자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엇박자가 나고 불협화음이 나기 쉬운 지점이다. 어디 상큼한 일이면 모를까 아내의 제안은 마트, 아울렛, 백화점 등 시장에 가자는 경우가 빈번해서 나는 쉬이 식상하고 내키지 않는다. 시장 보는 일은 평일에 미리 끝내 놔야지 뭐한다고 빈둥빈둥 시간 다 보내고 귀한 주말 시간을 그렇게 사용해야 하느냐며 나는 항상 불만이고 짜증이다. 대신, 평일날 시장에 가자면 나는 언제든지 같이 가는 편이다. 그것은 휴일을 가급적 온전하게 보전해놓고, 그만큼 여유를 갖고 싶다는 의도이기도 하다. 어쨌든 각자 개봉하지 않은 스케줄 주머니를 들고 맞이한 휴일 아침, 주도권을 잡아야 하는 절박한 순간인지라 자칫 말 한마디 잘못하면 기분 상하고 삐뚤어지기는 순식간이다.




   토요일을 맞아 막내 동생과 점심 약속이 있어 나갈 일이 있었다. 우리 형제들끼리 만나는 걸 아내가 늘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걸 잘 알기에 일단 서울에 볼 일이 있어서 다녀와야 한다고 선수를 쳤다. "무슨 일인데...?" 나는 절대 액면 그대로 말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아는 터여서 즉석에서 전혀 생뚱맞지만 신선한 핑계를 발굴하여 대답해주었다. "독서토론이 있어..." 신경 거슬리는 목록에 전혀 해당하지 않아서였는지 올리비아는 가볍게 콧방귀만 뀌고 말았다. 나는 곧바로 아내가 차리는 아침 밥상을 보고 맛있겠다고 칭찬을 해주며 국면전환을 시도하였다. 아내 얼굴에 금세 화색이 돌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내 머릿속에 파란 신호등이 켜졌다. '외출이 결재되었습니다.'ㅋㅋㅋ 약간 서운한 기색을 보이기는 하였으나, 아내는 잘 다녀오라고 말해주었다. "휴~~~!" 나는 휘파람을 불듯 통쾌한 기분으로 길을 나섰다.




   서울에 간 김에 몇 군데 더 들렀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시계는 벌써 오후 7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내는 어디 갔는지 집이 비어 있었다. 늦게 왔다고 분명히 한 마디 했을 텐데 마침 외출 중이어서 편안하게 들어설 수 있었다. 아내가 모르는 사이에 감쪽같이 들어오면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다. 스마트폰 전화기를 열어봤더니 아내의 부재중 전화가 한번 찍혀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문자메시지 하나가 나를 째려보듯 살벌하게 찍혀 있지 않은가. "염병하는지 전화도 안 받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섬뜩한 느낌이 들었. 카톡에도 문자가 와있었다. 전화, 문자, 카톡. 왜 이렇게 난리지? "7시인데, 오는지 가는지 소식이 없네." 7시라 하길래 나는 얼른 거짓말을 보태 바로 답을 보냈다. "5시에 왔는디...?" "온다 간다 말을 하고 다녀요!" "그런 당신은 왜 말도 없이 다녀? 난, 여태 설거지하고 이제야 샤워할라던 참인데..." "솥에 쌀 담가놨으니, 시간 11분 맞춰서 밥해놓으세요!" 아내는 명령하듯이 카톡 문자를 보내 놓고서는 잠잠해졌다. 나는 그걸 또 깜빡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샤워기 물을 틀다 말고 얼른 주방으로 가서 밥솥을 확인해보았다. 인덕션 레인지에 휘슬러 압력밥솥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본래 스테인리스 솥뚜껑 대신 투명하고 둥그런 유리뚜껑이 그냥 얹어놓은 모양으로 덮여 있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불을 켜고자 레인지 패널을 가는 눈으로 살펴보았다. 어디를 눌러야 불이 들어오는지를 몰라 한참 헤맨 끝에 엉겁결에 레인지 불을 켤 수 있었다. "11분, OK!" 시간이 정확하게 쎄팅되었다. 쌀을 씻어서 충분히 물에 담근 후 밥을 하는 때와 맹물에 계란을 넣고 찔 때에는 똑같이 11분간 각각 가열하면 밥도 잘 되고, 계란도 잘 쪄진다는 걸 나는 잘 안다. 아내가 여러 번 반복해서 나에게 가르쳐준 요령이다. 나는 레인지에 빨갛게 불이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다시 샤워실로 돌아갔다.




   문간 쪽 화장실에서 한참 샤워 중인데 아내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주방으로 가자마자 뭔가 큰소리로 투덜거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압력밥솥에 유리 뚜껑을 그대로 두고 불을 붙이면 어떡하냐며 역정을 내는 불만의 소리였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은 듯하였다. 불평하는 소리가 마치 독일군이 큰 소리를 지르며 유대인을 거칠게 다그치는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케 하였다. "아이쿠, 내가 잘못했구나! 미리 말을 좀 해줄 일이지..." 생각해보니 유리 뚜껑을 들어내고 본래의 스테인리스 뚜껑을 덮었어야 하는 건데 그대로 불을 붙여버린 것이 잘못이었다. 압력이 가해지지 않으니 밥이 제대로 될 리가 없겠다는 생각이 그때서야 들었다. 나는 샤워를 거의 마쳤으나 이미 주눅이 들고 쫄아서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갈 수가 없었다. 조금 기다리기로 하였다. 밖이 잠잠해진 틈을 타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갔다. 아내는 나에게 등을 돌린 채 식탁에 혼자 앉아 햇반을 데워서 먹고 있었다. 뒷모습은 아직 화가 가시지 않았다는 듯 굳어보였다. 나에게는 덜 된 밥에 약간의 물을 붓고 전자레인지에 넣어 데워서 식탁으로 가져다주었다. "음~, 먹을 만하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올리비아가 의외라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약간 꼬들꼬들한 맛이 좋은데...? 당신도 한번 먹어봐^^" 내가 좀 능청스럽게 말을 건네자 아내는 단칼에 잘라버리듯 거절하였다. "됐네요!" 나는 밥을 먹고, 재까닥 주방으로 가서 설거지를 깔끔하게 해치워버렸다. 아내가 피식 웃으며 복숭아를 깎았다. 아무리 창과 방패를 내려놨다 하지만, 방심하거나 안일해서는 안 된다. 항상 조심하고, 세심하게 신경 써야 한다. 아무리 시시콜콜하더라도 부부 사이의 신경전은 그야말로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운명이다.-ㅠ.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