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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Jan 12. 2023

볼멘 소리 '탁상공론'으로 멍든 하루

관리소장이 처리하는 행정업무의 내막과 비애

   해가 바뀌는 연말연시는 민원업무를 제외하고도 각종 행정처리로 바쁜 시즌이다. 특히 동대표의 임기만료와 새로운 임기 시작이 이어지는 때에는 더욱 그렇다. 서류를 만들고 챙기는 일이 대다수이다 보니 현장보다는 사무실에 머무는 시간이 비교적 많은 편이다. 관리사무소의 일이라는 것이 특성상 남을 시키거나 지시하여 대신하기 어려운 점 때문에 그만큼의 노력과 시간투입은 불가피하다. 각자가 담당하는 일을 깔끔하게 잘 처리해주면, 그것만으로도 땡큐(thank you)다. 소수 정예주의는 관리비를 부담하는 입주민들의 소망스런 바람이자 기대이다. 소장이 해야 할 일을 경리나 기전과장에게 하도록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문서작성을 포함한 서류 작업이 특히 그렇다. 며칠 전, 어느 민원인이 볼멘소리를 뒤에 남기고 간 것처럼 바로 이때가 '탁상공론'을 들먹일 만큼 현장으로 튀어나가는 기회가 다소 줄어들기도 한다. 그래도 그렇지. 헛... 참, 그냥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흉탄처럼 가슴에 박힌 그 한마디가 두고두고 자존심을 심하게 긁어댔다. '터졌다고 다 입이더냐, 신사복까지 차려입은 젊은 사람이 그렇게 함부로 지껄이면 되냔 말야!' 그렇게 되받아 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참아야 했다. 참고 견디는 것은 관리소장이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이니까.




   자기 집 베란다 앞에 서있는   나무가 이삿짐 옮기는데 거추장스럽고 방해가 되니 베어 달라는 것이었다. 직원들이 진즉 현장상황을 살펴보고 그건 어렵다고 정중히 얘기했음에도 막무가내였다. 이삿날 기어코 관리소장 좀 보자며 찾아와 시비를 걸듯 정색을 하고 따졌다. 조경수누구 한 사람만을 위해 함부로 자를 수 없는 공유재산이다. 별생각 없이 독단적으로 처리하다가는 자칫 곤경에 처하기 쉬운 예가 바로 일로 인하여 종종 발생한다. 관리사무소에서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 자기 말 안 들어준다고 화를 내고 그렇게 찾아와서 명령하듯 요구하고 억지 부릴 일이 아니다. 아무 데서나 '탁상공론' 운운하며 면박을 가하 안 된다. 지나치면 갑질로 비화되기 쉽다. 안타깝고 곤란한 상황은 피해야 한다. 민원인에게도 아쉬운 점이다.



   새해 시작과 함께 새로운 입주자대표회의가 출범하였다. 지난해 8월부터 순차적으로 진행해 온 선거업무가 순조롭게 진행된 결과다. 필수 직책인 회장, 감사 그리고 이사 등 임원 선출이 끝나 의결기구 구성이 완료된 것이다. 이제 회장 이름으로 관할관청인 구청에 구성(변경) 신고를 할 차례다. 신고 후, 청에서 그것을 수리하면 일련의 절차가 마무리된다. 신고서류를 한참 챙기는 도중에 그 민원인으로부터 '탁상공론'이라는 일방적인 말을 듣고 말았다. 속으로 화가 치밀어올라 잠시 감정이 흔들리고 중심을 잃을 뻔하였다.




   신고의무는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에게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관리소장이 회장의 이름으로 도맡아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택관리 업무 중 권한과 의무가 누구에게 있건 간에 그 실무처리는 모두 관리소장이 담당하기 때문이다. 그 일을 입주자대표회의 회장 명의로 하든,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명의로 하든 실제 그 행정처리는 관리소장이 다는 뜻이다. 실례로, 입주자대표회의가 어떤 사안에 대하여 주민동의를 받기로 결의하였다고 치자. 주민동의를 받는 일은 선거관리위원회 소관이므로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에게 협조요청 문서를 보내야 한다. 시행문 작성 - 회장 확인 - 발송 - 선거관리위원회 접수 - 선거업무 개시. 이런 일련의 문서작업을 소장이 담당한다. 그에 따라 실시한 주민동의절차가 끝나면,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은 다시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에게 그 결과를 문서로 통보하게 된다. 이번에는 아까와는 반대되는 역순으로 진행된다. 소장이 자기 자리에서 그렇게 오고 가는 문서작업을 다. 너무 꼼꼼하게 챙긴다고 할지 모르지만, 일을 빠짐없이 제대로 하자면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 일인극 코미디처럼 보일지라도.



   구청에 제출할 입주자대표회의 구성(변경) 신고서류를 챙기다 보니 은근히 화가 났다. 신고의무자는 회장이지만, 역시 명의만 그럴 뿐 관리소장은 모든 신고서류를 직접 준비하게 된다. 화가 난다는 게 회장이 해야 할 일을 관리소장이 해야 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간 아파트 단지에서 진행한 선거절차와 내용에 관한 서류 일체를 제출하라는 무지막지한 요구 때문이다. 신고서는 법 시행규칙에 별지 식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 신고서만 제출해도 될 텐데 거기에 첨부하라는 서류가 말은 간단하지만 분량이 상당하다. 각 서류철을 꺼내고 해당 문서마다 복사를 해야만 하는 작업이 불가피하다. 회의소집 공고문부터다. 그 공고문대로 회의를 개최하였는지, 회의 참석자와 발언내용, 그리고 의결 결과는 무엇인지를 기록한 회의록도 복사해야 한다. 이어서 회의결과 공고문도 한 카피. 회의록에 충실하게 작성하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동대표와 임원의 선출공고에서부터 당선자 공고까지 규정대로 했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각 단계마다 생산된 모든 서류를 증거로 보여주라는 주문 때문이다. 신고서 서식 한 장으로 제출하면 되겠건만, 이렇게 이실직고하듯 죄다 가지고 오라는 법령과 관청의 행위는 지나치다는 생각이다. 진작에 개선되고 간소화되었어야 옳다. 당최 믿지 못해서 그렇다는 공무원의 목소리가 귓전에 울리는 것만 같다. 아직도 주민자치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정년퇴직하고 관리소장으로 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점일 것이다. 이래저래 종일토록 탁상공론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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