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 무슨 생각하시나요?

속셈이 보이는 허접한 농담

by 쉐비

회의가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던 차에 대표 중 최고 연장자인 박 이사님이 불쑥 직원들의 급여가 너무 높다며 볼멘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하였다. 안건에도 없는 불만사항이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기 위하여 귀를 쫑긋 기울였다. 특히 내가 올 초 부임할 때부터 줄곧 정리해야 한다며 사적, 공적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난하는 김 주임을 겨냥하는 발언이었다.




김 주임보다 나이가 더 많았던 전임 기전과장은 지난봄, 급여를 더 주는 단지로 가야겠다며 미련 없이 사직서를 던지고 떠났다. 관리업계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부임한 지 한 달도 채 안 된 나에게 같이 일해보고 싶었는데 죄송하게 되었다고 인사를 건넸다. 비록 빤한 입 발린 말이라 할지라도 메이저 건설사 출신답게 매너를 잃지 않는 모습이었다. 거짓말이라도 오랜만에 예를 갖춘 점잖은 소리를 들었다. 이 바닥에서 그런 세상을 갈구하는 나에게 약간의 위안이 되는 말이어서 좋았다. 그런 사람은 물러가는 뒷모습도 아름답다. 훗날 서로 연락하며 지낼 수도 있고,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 같이 일할 수도 있는 가능성이 뒤에 남는다. 그가 사직의사를 말하던 날 당장, 주택관리사협회 홈페이지에 후임 기전과장 구인공고를 냈다. 급여는 그동안 그가 받던 액수 그대로 제시하였다.




사실 그가 여기를 떠나는 첫 번째 이유가 급여 수준이어서 더 인상해 유인책을 제시하고 싶었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소장에게 그러한 권한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소속한 관리업체에게도 없다. 오로지 동대표들로 구성된 입주자대표회의만 집단적 의사로 정할 수 있다. 설령 인재를 유인하기 위해 그만의 봉급을 인상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위로는 소장보다 더 많아질 수도 있고, 아래로는 반장이나 주임 등 다른 직원들과의 격차가 더 커져 사기저하는 물론 줄사표 사태에 직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고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혹시나 이력서 들어온 게 있는지 궁금하여 날마다 협회 홈페이지를 열어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그가 떠나기로 한 마지막 날까지 이력서가 단 장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럴 수가...! 하다 못해 경력이 일천한 초자라도 오는데...' 떠나기로 한 전임자는 그 월급 보고 오는 사람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하였다. '시장에는 온갖 사람들이 나와 있을 터인데, 그럴 리가...' 내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 주임이 자기가 아는 사람한테 연락해봐도 되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왜 아니겠어요?' 바로 전화해보라고 허락하였다.




그 사람은 이번에 퇴사하는 기전과장이 들어오기 전에 여기서 근무했던 경력자라는 것이었다. 다행히 연락이 닿았고 조건도 수락하여 근로계약서를 쓸 수 있었다. 김 주임보다 세 살 아래였지만, 그가 전화할 생각을 하는 걸 보면 그래도 관계가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가까스로 기전과장 자리를 메꿀 수 있었다.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신임 기전과장 역시 월급이 마음에 들었던 건 아니다. 과거 근무 당시 주민들과의 관계가 좋았고, 열심히 하면 월급도 올려주지 않겠냐며 낭창낭창하고 밝은 성격을 보여주었다. 나하고 닮은 데가 많아 손발이 잘 맞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렇다면 나는...? 1,000세대가 넘는 대단지에서 주민들의 드센 민원으로 지옥 같은 경험을 하다가 그만두고, 일부러 500세대 미만의 소규모 단지를 택해 원해서 이곳으로 왔다. 급여가 적어도 좋으니 좀 조용한 단지면 좋겠다고 본사에 호소하였다. 이동배치를 담당하는 매니저가 괜찮은 단지가 하나 나왔는데 월급이 지난번보다 100만 원 남짓 더 적다며 그래도 괜찮냐고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오케이 했다. 그 말을 듣고 내 딸이 하는 말, 스트레스 값이 100만 원이라고 생각하면 되겠다고 하였다. 일리 있는 코멘트였다. 그런 결과, 나는 추스르고 일어날 수 있었고, 본래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 보다 기쁘고 중요한 일이 이 세상 어디에 있나...!!




직원의 급여 수준이 너무 높다며 박 이사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열변을 토하는 동안, 다른 대표들은 묵묵히 듣기만 할 뿐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직원들의 입장을 대변하고, 비록 소규모이지만 조직을 꾸려 이끌어 가야 하는 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이 바닥의 인건비 상황인식을 바탕으로 몇 마디 반론을 펴는 것 말고는 더 이상 나아가지 않았다. 그 정도 선에서 자제하고, 다음 기회에 충분한 자료를 마련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설득하는 것이 현명한 처신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나름 설비기술이 있어 개인사업자로 일해온 박 이사는 최근 들어 이제 사업을 그만두고 취업을 하고 싶다는 말을 내 앞에서 종종 하곤 했었다. '아, 내일모레가 80인데도 저렇게 의욕이 살아있구나. 과연 받아주는 데가 있을까...?' 나는 놀라움 반, 회의감 반으로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 아직도 충분히 일할 실력과 능력이 있는 박 이사는 남 모르게 실제 이력서를 내보기도 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한 군데도 받아주는 곳이 없더라며 피식하고 쓴웃음을 지었다. 그 깊은 속을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쓴맛을 보고 나니 김 주임이 더 보기 싫고 미워졌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박 이사는 지난봄, 아스팔트 바닥에 금이 가 벌어진 틈을 나에게 가리키며 이거 언제 보수할 거냐며 한동안 다그치기도 하였다. 그러더니 석재용 접착제만 사놓으면 당신이 직접 보수해주겠다며 태도를 바꾸기도 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가 혹시 대가로 돈을 달라고 손을 내밀면 곤란할 것 같아 선수를 쳤더랬다. "이사님, 그 일 끝나면 제가 점심 살게요^^". 박 이사는 그러자며 능숙하고 노련한 솜씨로 보수작업을 해주었다. 동대표의 손을 빌려 민원 한 가지를 해결한 셈이니 마음 든든하였다.




지금까지 있었던 박 이사님의 말과 행동을 종합해 보면, 그가 은연중에 관리사무소에서 일할 기회를 바라며 나에게 접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대표가 그렇게 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단지에 거주하는 입주자라 할지라도 역시 곤란하고 허용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동대표직을 그만둘 생각이 있다고 가끔 의중을 내비치는 걸 보면, 그에 대한 나의 추측이 터무니없고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몇 십만 원이라도 용돈 벌면 좋지 않냐며 눈동자를 번득이며 나에게 말하던 모습이 유난히 잊히지 않는 잔상으로 남아있다. 더 일하며 돈도 벌고 싶은 욕구가 살아있으니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건전하고 건강한 생각이기는 한데, 그게 사실이라면 아무래도 번지수가 잘못된 것 같았다.




땅, 땅, 땅! 두 시간 반 만에 드디어 회의가 끝났다. 과거 다른 단지에서 일할 때에는 밤 10시 정도는 다반사였고 심지어는 자정을 넘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와 비교되는 지금 이 단지는 이 시간에 끝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케이스로 많이 늦은 편에 속한다.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회장님이 다른 대표들을 바라보며 뜬금없는 말 한마디를 던지며 씩 웃었다. "회의를 빨리 끝내야 하는데 많이 늦었네요. 회의가 늦어지면, 우리 소장님이 야근수당을 많이 받아가더라고~~~ㅋ" '햐~, 이건 또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참, 쪼잔하네...ㅠㅠ. 회장님의 사고방식이 이래서야 되나...!' 청소용역비 깎자고 할 때 나는 그것으로 그칠 줄 알았는데, 기어코 이런 말까지 하다니. 첫 회의 때 만나 나하고 동갑이라며 반갑게 악수를 청하고 잘해보자던 그였다. 여태까지 좋게 보았던 그의 이미지가 그 말 한디로 일거에 흐려지고 말았다. 사실 야간수당 이야기는 이번만이 아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저 지나가며 하는 농담인 줄로만 알았다. 또다시 들으니 그건 농담으로 포장한 진심이 아닌지 심히 의심스러웠다. 서로 동갑 쟁이 나이에 이런 말을 하다니 너무나 실망스러웠다.




회의가 끝난 다음 날, 머리가 아프고 몸도 피곤했다. 회의 결과 공고문을 내보내고 하루 휴가를 냈다. 어제 회의의 뒤끝이 영 찝찝하고 갑갑한 게 근래에 느껴보지 못한 스트레스로 남은 게 틀림없었다. 내가 좀처럼 일로 인하여 굴복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는 아무래도 정상 기분이 아니었다. 몸으로 하는 일보다 말로 가하는 압박과 그로 인한 스트레스의 강도와 임팩트는 훨씬 강하고 세다. 빨리 훌훌 털어내고 기분전환을 해야 했다. 마침 내일은 동생들과 인사동 단골집에서 월례 모임을 갖기로 한 날이다. 그래서 휴가도 냈다. 오 형제가 만나 시원한 막걸리나 한 사발 마셔야겠다. 그다음, 단골 2층 집 '풍경이 있는 전통찻집'에 가서 달콤한 아포가토 커피를 마셔야지. 이제 아는 사이로 통하는 그 집 젊은 사장이 이번에도 우리가 가면 도톰한 아이스크림 알 세 개를 담은 아포가토 커피와 유과로 서비스해 줄 것이다. 그 집 창가 쪽 자리에 앉아 가끔은 2층 아래 인사동길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시름없는 얘기를 나눠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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