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가 시작되고 대형 태풍이 지나가면서 민원전화가 급증하였다. 집에 물이 샌다는 신고가 다수였다. 관리사무소로 직접 찾아와 호소하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주방의 싱크대 천정이 젖었다는 집이 많았다. 거실 천장에 물이 들어와 전등 안에까지 물이 찼다는 집도 더러 있었다. 세탁실 배관 피트(pipe pit)를 지적하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탑층(최상층)에서 지하까지 각 세대 주방과 세탁기에서 나오는 하수가 모여 배출되는 수직 배수관이 지나는 기둥 통로 벽이다. 그 천정에서 물이 샌다거나 벽에서 물이 나와 젖어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단지가 됐든 누수 민원은 머리가 아프다.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어서 그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외벽에 금이 가서 특히 큰 비가 오면 그 틈으로 물이 들어온다거나, 옥상 방수가 잘못돼 물이 스며드는 것이라고 나름의 처방전을 내밀며 대책을 요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고 묻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과거의 피해나 보수 경험을 토대로 추정되는 원인을 미리 알려주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과거의 경험이 생각나 호통치거나 거칠게 말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염려했는데 다행히 그런 경우는 없어서 안도하였다. 무엇보다 누수 탐지 전문가나 방수 전문가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추석날 밤에는 횡주관 하수가 역류해 음식물 쓰레기가 저층 세대로 들어가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역겨운 냄새가 엄습하며 싱크대 주변에서부터 거실까지 엉망이 되었다는 다급한 민원이었다. 하필 명절날, 거의 자정이 다 돼가는 심야 시간이었다. 피해를 입은 그 집은 오죽할까 싶어 걱정스럽고 당혹스러웠다. 당직을 서고 있던 기전과장이 현장에 출동하여 실상 보고차 급히 나에게 전화를 하였다. 몇 달 전에도 같은 사고가 발생한 적 있었는데 공교롭게 이번에도 그 집에서 똑같은 사고가 다시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저런...! 이걸 어쩌나 하고 고민해야 할 긴박한 상황이었는데 집주인은 이미 업자를 집에 불러놓고 있었다. "보수작업을 할까요, 말까요?" 아마도 실제 작업을 이미 착수하였을 것도 같은데 김 과장이 능글맞게 나의 구두 결재를 받겠다며 물었다. 모종의 책임추궁을 두려워하는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일처리 방식이기도 하다. "그 상황에서 당장 작업을 해야지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겠소?" 전혀 머뭇거릴 일이 아니어서 반문하며 허락하였다. 오히려 그 야심한 밤에 업자를 직접 수배한 집주인의 순발력이 놀라웠다. 다행이라 생각하였고 고맙기도 하였다. 업체명과 공사비가 얼마인지 계약의 기본사항을 김 과장에게 물어보며 체크하였다. 그 업자 역시 지난번에도 왔던 사람이었다. 약간 비싸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부르는 게 값이 된 불가피한 상황인지라 그냥 그런 줄 알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과 같은 값으로 하자고 즉석 합의를 봤다. 나는 고생하는 김 과장에게 사고가 난 현장과 공사 전, 후 사진을 잘 찍어놓으라고 당부하고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곧바로 입주자대표회의 단톡방에 긴급 보고의 글을 올렸다. "선 조치 후 결과 보고하겠습니다."
장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 예년처럼 몇 차례 태풍이 더 지나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처럼 방송에서 비가 온다는 예보만 나오면 내 가슴은 이미 덜컹거리기 시작하였다. 접수된 세대 공용부 누수 하자를 어떻게 보수할지 한참 고민하고 있을 즈음, 한통의 고약한 민원전화를 받고 말았다. 그는 나에게 아저씨, 당신이라고 닥치는 대로 부르며 자신의 집을 언제 고쳐줄 것이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왜 당신이라고 함부로 말하냐고 물었더니, 다 사전에 나오는 말인데 그게 욕이냐며 오히려 기고만장하고나왔다. 그의 독특한 말투에 기가 막혀 여러 번 말문이 막히기도 했지만, 나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정중하게 대답을 해주려고 인내심을 최대한 발휘하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밖에도 말없는 다수 민원인의 입장을 생각해보건대 속히 일을 서둘러야 했다.누수 민원 역시 긴급사항이어서 처리 방침을 미리 입주자대표회의에 적시에 안건 상정하고 의결을 받아둔 상황이었다.
아파트 옥상에 줄을 매달고 내려와 외벽 보수공사를 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과거 공사계약 서류를 뒤진 끝에 우리 단지에 유독 자주 왔던 업체가 눈에 띄었다. 얼마 전에 우리 단지에 외벽 공사 광고를 했던 사람도 생각이 나 연락처를 찾아보았다. 그 두 군데를 불러 견적을 의뢰하기로 하였다. 서로 다른 날 우리 단지를 방문한 방수업체 사장님을 대동하고 누수 민원을 제기한 세대를 일일이 방문하였다. 내가 미리 정리한 누수 세대 현황과 사진대지를 보여주며 실제 현장까지 보고 판단해달라고 주문하였다. 나는 전문가인 그 사람들이 관찰하는 모습과 의견에 쫑긋 귀를 기울이며 꼼꼼하게 기록을 하였다. 보고 배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각 세대의 누수 원인과 처방을 민원인에게도 명확하게 설명을 해주도록 요청하였다. 전문가의 말을 들은 민원인들은 거의 100%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모습이었다. 내가 원하는 대목이어서 내심 '그렇지!' 하며 소리 없이 쾌재를 부르기도 하였다. 전문 기술자가 하자의 원인과 부위에 따라 관리사무소가 해야 할 일과 세대가 자체 처리해야 할 일을 명확히 구분해줌으로써 즉석에서 민원이 종결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이제 방수 전문가인 그 사람에게 방침대로 오더(order)를 주면 될 일이었다. 민원해결의 가닥이 그렇게 잡혔다. 한동안 내 마음속에 끼어있던 짙은 안개가 순식간에 걷히는 듯해 후련하였다.
(좌)세탁실 배관피트 누수 흔적 (중)싱크대 누수의 원인이 된 외벽 크랙(crack) (우)모니터로 보는 피트(pit) 내부 내시경 검사
돌아보니, 이번 달 24일이면 내가 관리소장으로 일한 지 꼭 1년 하고도 6개월을 맞는다. 1.5년의 경력이 굳어지는 달이다. 언제 경력 쌓을까 하고 까마득하기만 했는데 각고 끝에 이만큼 온 것만 해도 나에게는 뿌듯한 일이다. 지나온 길에 무시와 질시와 비아냥도 분명 있었고, 따라서 서러움도 없지 않았다. 지금껏 살아오며 축적한 인내심과 아량을 힘겹게 발휘하며 이만큼 지나고 보니 어느 정도 나의 존엄을 되찾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작년 1월 20일, 미국의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 이 바닥에 첫발을 내디뎠다. 데뷔전을 치른다는 마음으로 나름 최선을 다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런 실무경험도 없이 처음 해보는 일이라 서툴고 어리바리하며 헤매기도 하였다. 게다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거칠고 끊임없는 민원의 파고를 위태위태 견디며 꾸역꾸역 가다 보니 잘하면 1년도 채울 수 있겠다는 당돌한 생각도 한때 해보았다. 유난히 테라스 하우스(terraced house)가 많았던 그 단지에서도 누수 민원이 많았다. 하지만, 동료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나만 몰랐던 그 악명 높은 단지는 나에게 결코 그런 기회를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았다. 10달 만에 그만둬야 했다. 잠시 쉬는 기간은 심하게 생채기가 난 나의 순한 마음을 치유하고 다잡는 시간이었다. 2022.2.24일, 나는 일터를 바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훗날 알고 보니 그날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던 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계사적으로 끔찍하고 안타까운 사건이 일어난 날을 계기로 다시 나의 발자취 하나를 새겨두기로 하였다. 친구들은 이렇게 기억하는 나의 방식이 재밌다며 웃곤 한다.
1.5 하면, 우스갯소리로 춘천의 1.5 닭갈비집이 생각나기도 하지만, 나는 나의 경력과 관련하여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졌다. "'0'에는 무엇을 아무리 곱해도 '0'일 뿐이다. '1'을 만들어내야 비로소 새로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퇴사 준비생의 도쿄(이동진 외 지음)>라는 책에서 읽었던 대목을 수첩에 메모해둔 지 오랜데 바로 지금 이 순간 달게 써먹기 위한 준비작업이었던 것 같아 유쾌하고 기뻤다. 앞으로 하는 일은 약간의 변형이 있을지언정 한 번쯤은 해본 일들의 반복이 될 것이다. 기업가 고(故) 정주영 씨가 생전에 "해봤어?" 하고 자주 묻곤 했다는 말이 유난히 가슴에 와닿았다. 맞아, 한번 해본다는 것이 자신감의 원천이지. 1.5는 1보다 절반이 더 크다. 승수가 붙는다면 그만큼 효과는 더 크게 벌어질 것이다. 기반이 만들어졌다.
'그래, 이제 감잡았어!' 입주자 등이 가려워하는 곳 있으면, 재빨리 가서 파악해보고 신속하게 처방전을 제시하라. 필요하면 돈(관리비)을 써야 하는 것이니 신중하되 주저하지 말라. 아끼고 절약해야 하지만, 그것이 언제나 미덕이 되는 건 아니다. 전문가를 찾아 적극 활용하고, 직원들이 각자 제 역할과 몫을 다하도록 지혜롭게 리더십을 발휘하라. 몸소 나서서 일을 직접 하는 것만이 잘하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잘 움직이도록 생각하고 기획하고 지휘감독을 잘하는 사람이 곧 능력 있는 소장임을 명심하자.^^영세한 주택관리 방식과 열악한 근로환경, 어정쩡하게 도입되고 수년째 내팽개쳐진 채 진화가 멈춘 주택관리제도 등은 개선하고 발전시켜야 할 숙제다. 미미하더라도 이 바닥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보자는 초심을 잃지 말자. 내가 여기에 머물고 있는 자체가 의미 있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