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 압박

고령사회의 촉탁근로자 대우하는 법

by 쉐비

아침부터 마음이 바빴다. 입주자대표회의가 코앞인데 아직 회의자료 작성을 마무리짓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오늘은 꼭 끝을 내고 동대표들에게 배포할 작정으로 일을 서둘렀다. 모닝커피를 한잔 할까 하고 탕비실 쪽을 힐끗 쳐다보다가 이내 단념하였다. 아니, 잠시 미루기로 하였다. 연로한 박 이사님이 곧 관리사무소에 들이닥칠지도 모르니 혹시 나오시면 그때 같이 마실 요량이었다. 내후년이면 나이 80세가 되는 그는 동대표 중 최고 연장자이다. 관리사무소 바로 옆 동에 사는 그는 수시로 와서 차를 마시고 간다. 그의 말 속에는 밖에서도 틈만 나면 관리사무소를 지켜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배어 있다. 사무실 바닥에 간이침대를 펴고 잠을 자는 기전반장을 나무라며 당직근무자가 밤에 왜 불을 끄고 자는 거냐고 소장인 나에게 고자질하듯 못마땅해한 것이 여러 번이다. 평생 설비 분야에 종사해온 야전의 전문가답게 확실히 그 분야에 특화돼 세상을 보는 남다른 눈이 있다. 관심이라면 관심이고 의견이라면 의견인 자신의 견해를 자주 드러내는 편이다. 참견하거나 말이 많고 아집이 세다고 느껴서 그런지 은근히 그를 피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친척이고 친구고 간에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이 많아 같이 놀 사람이 별로 없다고 심경을 토로한 바 있었다. 주변에 말동무가 없어서 외롭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소장으로 부임한 나를 테스트하거나 길들일 생각으로 관리사무소에 자주 나타나는 줄 알았다. 아니면, 직원들이 출퇴근을 제때 하는지, 일은 안 하고 사무실에 앉아 빈둥빈둥 놀고 있지나 않은지 살피는 감시활동일 수 있다고 의심하기도 하였다. 내가 부임하기 전부터 직원들에 대하여 뭔가 불만과 불신이 있는 듯한 눈치였다. '천하의 내가(...^ㅋ^) 이토록 속 좁고 유치한 생각까지 하다니!' 스스로를 책망하였다. 나 비록 경력이 짧은 소장이긴 하지만, 세상에는 내 맘 같지 않은 별 사람이 수도 없이 많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느 프랑스 작가의 소설 제목처럼 '모두가 세상을 똑같이 살지는 않는다.' 그의 의중을 의심하는 나의 독단적인 생각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박 이사의 경우는 그것보다는 '외롭다'는 데 방점을 찍을 만했다. 비록 연세가 고령이기는 하지만, 호기심과 의욕은 남달리 왕성한 편이다. 뭔가 궁금하면 인터넷이나 유튜브를 검색하며 직접 찾아볼 정도로 열성이다. 젊은 사람들과 대화하더라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제스처로 비쳤다. 새로 온 소장이 말이 좀 통한다고 생각했던 것인지 어느새 이웃집 어르신처럼 스스럼없이 찾아오는 관계가 되었다. 어떤 주제라도 좋고 주고받는 대화가 매끄럽다면 점차 신뢰가 싹트고 쌓이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아무 생각 없이 오지는 않는다. 얘기를 나누다 보면, 단 한 마디라도 업무와 관련한 할 말이나 의견을 반드시 내놓곤 하였다.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스마트폰 주식 시세판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박 이사가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제 많이 올랐는데 오늘도 조금 오르네...^^" 가만히 앉아서 용돈 좀 벌었다며 어깨를 으쓱했다. 전화기를 곧 내려놓고서 며칠 전 설비공사 다녀온 일, 주말농장에 다녀온 일, 지난주 성당에서 봉사 활동하던 일 등을 목소리 톤(tone)과 표정을 바꿔가며 들려주었다. 자주 꺼내는 메뉴들이다. 잠시 말이 끊기고 정적이 흐르는 사이에 막 자리를 비우고 나간 김 반장 얘기를 하였다.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니 언짢더라도 잘 들으라고 했다. 김 반장도 껄끄러운 박 이사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말을 한 발짝 떨어져 들으며 앉아있기가 거북해서 그런지 일부러 자리를 피하는 것 같았다. 박 이사는 다짜고짜 김 반장 일하는 태도가 틀려먹었다며 분개하였다. 나이를 소장보다 많이 먹어서 말을 잘 듣지도 않을 것이라고 단정하듯 말했다. 자칫하면 소장 뒤통수를 칠 수 있으니 빨리 정리하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하듯 말하였다. 뒤통수친다는 말이 나에게는 좀 충격적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 사람 눈동자를 보면, 흐리멍덩하고 거의 죽어있는 모양이라며 걱정된다고 했다. 일꾼처럼 열심히 일을 해야 할 사람이 몸이 시원찮으면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만에 하나 쓰러지기라도 하는 날이면 그것은 곧 소장 책임이고, 주민들도 결코 자유롭지 못할 텐데 어쩔 거냐고 나를 쏘아봤다. 단순히 나이가 많아서가 아니라 건강상태가 믿음직스럽지 못하니 정에 얽매여 머뭇거리면 안 된다고 하였다. 뜻 밖에 그 말을 듣고 나는 잠시 어리둥절하였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동안 내가 지켜본 바와는 사뭇 다른 생각이어서 더 당혹스러웠다. 유난히 김 반장에게 가혹한 비판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은 뭔가 사람 사이에 남아있는 악감정이 작용하는 결과가 아닐까 하고 나 혼자 생각하였다. 박 이사는 관리사무소 직원들에게 주는 급여 수준에 대하여도 좀 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특히 나이 60세가 넘은 사람은 채용해주는 것만 해도 고맙게 여기고 다녀야지 임금을 올려달라고 하면 안 된다는 식이었다. 유독 그 말을 여러 번 되풀이하는 걸 보면, 작년 말에 결정한 임금인상이 불만스러웠던 것 같았다. 심지어는 일반 직장에서 처럼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임금피크를 적용해야 한다는 견해도 가지고 있었다. 그 역시 김 반장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로 들렸다. 사고방식이 참 독특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자기확증편향이 심했다. 60세가 넘은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야박하게 대하는 것일까. 당최 수긍하기가 어려웠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60세를 넘긴 사람들이 제법 많다. 외주 용역으로 운영하는 경비와 미화 부문에 특히 많기는 하지만, 관리주체 소속 기전직에도 상당한 편이다. 확실히 고령사회에 진입한 우리나라 고용시장의 변화된 양상이 아닌가 싶다. 관리소장이 임면권을 가지고 있는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채용은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법은 나이에 따라 차이를 둘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가령 반장처럼 정년(60세)을 넘긴 사람들은 촉탁직(囑託職) 근로자로 채용하는 것이다. 촉탁직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같은 직장에서 근무하더라도 정년에 달한 근로자를 보통 1년 단위의 계약직 형태로 다시 채용하는 것을 말한다. 촉탁(囑託)이란 말을 사전에 찾아보면, 일을 부탁하여 맡김, 정부기관이나 공공단체에서 임시로 어떤 일을 맡아보는 사람, a part-time employee 등으로 풀이하고 있다. 임시 또는 부정기적인 용역 제공을 위하여 채용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관리소장이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경우라면 당연히 촉탁 근로자로 채용할 수가 있다. 그렇지만, 촉탁 근로자가 일할 수 있는 기한은 주택관리업자의 취업규칙상 만 70세에 도달하는 달의 말일까지로 규정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실무적으로는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우려하여 회사가 제시하는 일정한 요건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채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혹시 건강이 안 좋아져서 그만둬야 한다거나 회사의 형편상 구조조정을 이유로 해고하더라도 전적으로 수용하고, 회사에는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라는 것이다. 본인의 서약 외에 배우자나 자녀 등 가족 구성원의 동의서를 같이 받기도 한다. 관리주체가 고령 인력을 채용하는 대신 사전에 강구하는 면책 방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60대 촉탁 근로자들의 처우는 취약하고 불안정하며 일방적이고 가혹하기도 하다.


주택관리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입주민이나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원(동별 대표자)이 보기에 일부 직원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는 있다. 그렇다고 박 이사처럼 그 사람을 콕 찝어서 내보내라거나 혹은 바꾸라고 요구하고 압박하는 것은 위탁관리방식의 취지상 바람직한 방법은 아니다. 반드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보통 2~3년 단위로 위탁관리 계약을 체결하므로 계약기간이 끝나가는 시점에 관리주체가 제공한 서비스를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재계약 여부를 결정하면 될 일이다. 관리소장은 문제 있는 직원이 있더라도 그를 훈계하고, 교육하는 등 전체 직원이 성실하고 열심히 일을 해서 성과를 내도록 총괄, 지휘하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주민들은 소장이 그렇게 재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고 성숙한 모습이다. 물론 입주자등의 여론과 민원 상황을 보고 불가피 직원의 해고를 결심해야 하는 상황도 비일비재 하지만, 가장 최후에 할 일이다. 동대표가 됐든 입주민이 됐든 관리사무소에 와서 무슨 말을 하더라도 경청하고 성의껏 응대하는 것은 관리소장의 마땅한 자세이다. 박 이사의 경우처럼 말동무가 되어주는 것도 필요한 서비스다. 반면, 김 반장처럼 60대 후반에 접어들어 70세가 멀지 않은 나이에 사직을 강요받는 사람들의 마음은 착잡할 수밖에 없다. 그만두면 더 이상 이직을 생각하기가 거의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입주민들이 운영시스템을 이해하고 참여한다면, 관리사무소는 지금보다 나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keyword
이전 13화눈치 보이는 청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