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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껌 Jul 19. 2021

허술함의 미학

학교에서 2.5km 떨어진 곳에 쿠지라는 유명한 해변이 있었다. 난 쿠지를 꽤 지겹도록 자주 갔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딱히 할 일이 없을 때, 사람들과 등등. 언젠가는 분명 그곳을 그리워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코로나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이 시점에 그때의 생각이 맞았음을 새삼 확인한다.


우리 학교 캠퍼스는 스키 슬로프처럼 길쭉하고 경사가 심하다. 캠퍼스 아래에서 위로 뻗은 두 도로는 High street과 Barker street인데, High street의 이름에서 보다시피 지대가 높다. 쿠지를 가기 위해서는 두 도로 중 하나를 타고 쭉 올라가 랜드윅을 지나 쿠지로 다시 내려가야 했다. 캠퍼스 위쪽에 있을 땐 쿠지까지 걸어가곤 했고, 아래쪽에 있을 땐 버스를 탔다.


해질녘에 바닷가에 가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미 산 지 2년이나 지났는데, 내가 해질녘에 보는 노을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왜 이제껏 안 가봤지?’라는 생각이 들자 계획 없이 쿠지행 버스를 탔다. 버스는 Barker street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천천히, 천천히.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가 거의 서 있는 것 같았다. 엄청난 경사가 있는 도로에서 우리는 거북이가 가는 속도로 아주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이러다 뒤로 미끄러지는 거 아냐? 너무 심한데?’


Barker street을 다 오르기까지가 너무 길게 느껴졌다. 다행히 언덕을 지나 랜드윅에 진입하는데 갑자기 젊은 버스 운전사가 뒤쪽을 돌아보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혹시, 쿠지까지 어떻게 가는지 아시는 분?”


‘뭐야 장난해?’

랜드윅과 쿠지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버스기사는 당황해 보이기보다는 그냥 초행길을 옆 운전자에게 묻는 듯 느긋한 구석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 허술해 보였다.


나를 비롯한 버스에 몇 없는 승객들은 어색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다행히 어떤 성격 좋은 남자 한 명이 기사 옆에 서서 어디에서 좌회전, 우회전을 해야 할지 알려주었고 우리는 안전하게 쿠지에 도착했다.


 허술한 운전기사는 아마도   노선을 운전하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버스 기사를  시작했을지도. 그의 서툰 운전 실력을 보며 묘하게 힐링되는 느낌이 들었다. 영어 단어의 쓰임, 논문 쓰기의 형식 등에 대해    없을 정도로 비판받던 때에, 운전 실력이 서툴러도 승객들과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는 그의 모습은 이상하게도 마음에 위로가 되었다. ‘뭣이 중헌디라는 유명한 대사가 떠오르며.


해질 무렵의 쿠지는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유모차를 끌고 산책하는 사람들, 운동하는 사람들, 모래 장난하던 아이들, 노을을 배경으로 멋진 실루엣을 보이며 오랜 시간 동안 춤추던 여자와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 해질 무렵 오늘 문득, 빽빽하지 않아서 완벽했던 그날의 쿠지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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