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있는 상태였다면 받지 않았을 것이다. 잠결에 울리는 폰을 집어 드니 모르는 번호였다. 찰나의 시간 동안 의심과 충동 사이에서 저울질을 했다.
가끔은 사물이 말을 한다. ‘받아. 아는 사람이야’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휴대전화 판매원이나 설문 조사를 하는 사람이 아닌 건 확실했다. 50대 후반 정도 아주머니의 목소리를 가진 사람은 내게 본인을 기억하느냐고 정중히 물었다. ‘네네’라는 나의 짧은 답이 그분께는 ‘이 사람이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라는 사인이었는지 말을 이었다.
“우리 호주에서 오는 비행기에서 같이 앉았었어요.”
나는 여전히 이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저 내가 왜 낯선 사람에게 내 연락처를 주었는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이 사람은 왜 굳이 연락한 건지에 대한 생각이 졸음 기운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몇 분간을 내가 당신께 ‘신발을 옷이랑 맞춰서 신으셨네요'라고 말했다는 것과, 당신이 사시는 곳, 당시 유학을 하던 따님의 대학의 이름을 말해주셨다. 안타깝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네. 죄송합니다. 제가 옆에 앉으신 분들이 너무 많아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어떤 일로 전화하셨어요?”
그분은 내가 시드니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것, 내가 인터뷰를 위해 한국에 간다는 것, 서울에서 어디에 머무를 지에 대해서 말한 것을 이야기했다. 말 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말한 것은 분명하리라. 다 맞는 이야기니.
“어떤 일로 호주에는 가신 거예요?”
“우리 남편이 그때는 재직 중이었는데, 회사에서 보내줘서 갔어요.”
번뜩 이불을 박차고 앉았다. 30년을 근속하여 회사에서 여행을 보내주어 호주에 갔다던 부부. ‘여행으로는 좋은 곳이죠.’라며 부러움의 말을 했던 나. 그들의 여유 있는 여행이 부러웠던 건지, 30년 동안 한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남편분의 끈기가 부러웠던 건지, 30년 동안 직원이 다닐 수 있는 좋은 회사에 다닌다는 게 부러웠던 건지, 한참 어른임에도 젊은 사람에게 깍듯이 존대하며 말할 수 있는 당신들의 정중함이 부러웠던 건지. 숨 막히는 압박감에 천혜의 자연을 오롯이 즐기지 못했던 나, 박사 3년 차에 인내심이 바닥났던 나, 날을 세우고 마음이 다치면 모진 말을 쏟던 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게 기억났다.
기억 속 나는 그런데, 그분 기억 속 나는 조금 다른 모습이었다.
“ㅇㅇ님 어머니 공항으로 오실 때까지 시간 남는다고 우리 짐 나올 때까지 같이 기다려 줬어요.”
“나이가 한참 많은 우리 이야기를 잘 듣고 이해해 주었어요. 그 나이 대에 그러기 어려운데”
어색해서였을까, ‘어제 엄마랑 서로 이해 못 한다고 전화로 싸웠는데요.’라고 웃으며 반박했다.
“엄마랑 딸은 원래 그런 거예요. 나도 우리 딸이랑 맨날 그래요.”
내가 왜 전화번호를 드렸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기억을 되찾고 40분을 더 이야기를 했다. 그분은 그저 나의 인상이 좋았고, 대화가 통했다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었다. 이야기의 끝에는 ‘전화 주셔서 감사하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도대체 그 많던 인연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라고 아쉬워하던 때였다. 통화 후, 스쳐간 인연들의 기억속에 나의 모습이 어떠한 형태로든 남아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됐다 그럼. 있으면. 있기만 하면. 어디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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