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걷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와 같이 걷는 것도 좋지만 혼자 걷는 것은 더 좋아한다. 혼자 걸으면 온전히 해질녘의 분위기에 집중할 수 있다. 여름에는 덥지 않아 좋고, 겨울에는 추워지기 직전 해가 마지막 온기를 짜내는 것 같아 따뜻한 기분이 들어 좋다. 봄과 가을에는 선선한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리며 한 올 한 올 해질녘의 빛으로 반짝이는 게 좋다. 해질녘에 해의 방향으로 걸으면 낮에는 마주할 수 없이 눈부시던 해와 마주할 수 있어 좋다. 해질녘에 해를 등지고 걸으면 나보다 키 큰 그림자와 같이 발맞추어 걸을 수 있어 좋다.
오늘은 해질녘에 한강을 따라 혼자 걸었다. 날이 좋은 주말이라 앉을 자리 없이 붐볐다. 해질녘은 붐비는 때에도 활기차서 좋다. 사람들을 지나 해 쪽으로, 해 쪽으로 닿을 수는 없지만 마주할 수 있는 해를 좇아 한참을 걸었다. 사람들과 떨어져 오랜 시간 걷고 나니 주변이 조용해 졌다. 해질녘에 조용하면 고요해서 좋다. 마음이 차분해지고 생각들이 범람하다 조용히 가라앉는다. 어느 정도 걸었을 때 뒤를 돌아 해를 등지고 왔던 길로 걸었다. 나보다 키가 세 배 정도 큰 친구가 따라붙어서 걸음을 맞췄다. 든든했다. 그 친구는 내가 한 걸음 한 걸음 걸을수록 키가 내 발바닥 길이만큼 조금씩 커졌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같이 가는 거야, 따라 오는 거야?’
<같이 가는 거야>
‘따라오는 것 같은데, 넌 점점 이상하게 커지고 있어.’
<맞아. 네가 걸을수록 나는 커지게 되어있어>
‘친구인 줄 알았는데 두려움이었구나.’
<난 네 마음의 크기야. 네가 걸을수록 근육이 붙고 크기가 커지지.>
‘근육이라니, 넌 흐리멍덩하고 어두워.’
<보이는 것만 가지고 판단하는 구나.>
‘맞아. 누구나 그렇지 않아?’
<내가 두려움이라면 점점 크기는 커질지언정 흐려지고 있으니 괜찮은 거 아닐까?>
‘역시 그렇다고 인정하는 셈이구나.’
<내가 두려움이라면 없어질 테니 좋은 것이고, 내가 너의 마음의 크기라면 더 커지니 좋다는 이야기를 하는 거야. 나는 네 마음이고, 힘이고 친구지만 네가 두려움이라고 믿어도 상관없다는 거야>
‘사라지는 거야?’
<맞아. 나는 점점 커지다가 사라져. 내가 없어지고 나면 너는 이 전보다 더 잘 걸을 수 있을 거야. 내가 사라지면 마음의 크기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너의 힘으로 바뀌는 거야>
‘네가 내 편이라면 증명해봐.’
<내가 사라지고 나서 다른 친구를 보내줄게. 곧 알게 될 거야.>
공기가 차갑다고 느껴진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그림자 없이 나 혼자 뚜벅뚜벅 길을 걷고 있었다. 얼마간 걸었을 때 동쪽하늘에 크고 동그란 보름달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가만히 있는 것 같던 보름달은 내가 가까이 갈수록 남쪽 하늘로 조금씩 조금씩 올라가며 빛을 냈다.
지금, 창문 너머 남동쪽 하늘에 나무들 틈 사이로 보름달이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