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여행지 숙소는 잠만 자는 곳이라 혼자 여행한다면 도미토리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일본의 골든위크(주말과 일본의 공휴일이 겹쳐 일본인들이 많이 여행을 다니는 시기)가 시작되는 주말이어서인지 호텔 숙박 가격이 평일보다 훨씬 비싸졌고, 마을 자체가 온천 관광이 테마인 노보리베쓰의 경우 가족 단위 1박에 50만원 정도를 훨씬 웃돌았다. 그런 이유로 주말을 도미토리로 예약하고, 마지막 월요일 숙박만 따로 호텔로 옮기기도 귀찮을 것 같아 그것도 같은 도미토리로 예약했다. 내가 고려하지 못한 건 마지막으로 도미토리에서 지냈던 게 아주 까마득한 옛날이고, 내 취향과 성격이 그 때에 비해 드라마틱하게 변화했다는 사실이었다.
호텔에서 아늑한 나만의 3박을 지내고 나서 앞으로 3박을 도미토리에서 지낼 생각을 하니 노보리베쓰역에 다가올수록 압박감이 느껴졌다. 사생활이라고는 전혀 없이 벙커 같은 침대에 박혀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하니 숨이 턱 막혔다. 도미토리에 먼저 있다가 호텔로 가는 순서였으면 천국 같았을 텐데, 이미 나만의 천국을 맛보고 나니 도미토리행이 마치 그날 가는 지옥 계곡의 이름처럼 마음 지옥으로 빠져드는 듯 했다.
내가 예약한 도미토리 호스텔은 노보리베쓰역 1분 거리였다. 3분도 아니고 1분. 진짜 그냥 바로 앞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가까워서 그것만큼은 아주 훌륭했다. 3시가 되자마자 체크인을 하니 침대 12개 정도가 있는 긴 방의 입구 바로 앞에 있는 아래쪽 침대를 배정받았다. 고백건대, 다음 날 오전 체크아웃을 할 때까지 방에 있는 그 누구의 얼굴도 보지 못했다. 자리에 없거나, 침대 커튼을 닫아놓고 벙커에 있거나, 안쪽에 있는 침대라서 내가 못 보거나 하는 경우였다.
체크인 후 짐만 내려놓고 지옥계곡이 있는 온천마을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다시 역으로 갔다. 주말이어서인지, 유명한 온천 관광지여서인지 특히 외국인 관광객이 역 안쪽과 버스를 기다리는 줄로 가득했다. 시간이 되어 탄 버스는 앉을 자리 없이 가득했고, 나 또한 인파에 앞문 쪽으로 밀려서 (일본은 버스를 뒷문으로 타서 앞문으로 내린다) 아슬아슬하게 서 있었다. 온천마을까지 가는 중간 중간의 정류장에서는 뒷문으로 사람이 탈 수 없어 앞문으로 탔다.
온천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버스에 탄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하차했다. 지옥 계곡으로 가는 길로 음식점과 기념품 가게, 편의점 등이 몰려 있었다. 계곡 입구에 다다르자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입구에서 가이드가 하는 설명을 듣고 있었다. 옆으로 빠져나와 계곡 아래가 보이는 길로 올라가니 실로 이 전에 본 적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황량한 황토색 계곡 바닥에서 흰 연기가 뿜어져 나오고 유황 냄새가 사방에 진동했다. 화산 활동이 활발한 나라에 있다는 걸 체감할 수 있었다.
거기에 가기 전까지는 지옥 계곡과 가까운 오유누마 연못에 갈까 말까 고민을 했었다. 막상 가고 나니 사실 계곡을 보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고, 최대한 호스텔에 늦게 돌아가고 싶어서 몹시 피곤했지만 오유누마 연못까지 가기로 했다.
오유누마 연못에 도착해 아래를 내려다보면 지옥계곡과는 또 다른 느낌의 ‘와’라는 탄성이 나온다. 연못이라고 부르기에는 호수만큼 규모가 상당하고, 지옥계곡에서는 땅에서 연기가 솟았다면 오유누마 연못에서는 물에서 연기가 올라오며 진짜 온천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아름다운 느낌의 장관이라기보다는 위압감을 주는 특이한 광경이었다.
노보리베쓰에서 온천 시설이 있는 숙소에 묵지 않는 한 지옥계곡, 오유누마 연못을 가는 것 말고는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역 주변 식당도 특별히 없고 가게들은 온천 입구에 몰려있기 때문에 나는 그냥 오유누마 연못에 배가 고플 때까지 있기로 했다. 포토스팟에서 적당히 떨어진 연못이 보이는 벤치에 그냥 멍때리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 장소에서만 한 시간 정도를 있다 보니 다양한 관광객들이 잠시 와서 사진을 찍고 다시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하코다테에서는 한국어를 들을 일이 많이 없었는데, 오유누마 연못에서는 가족 단위로 온 한국 관광객이 많았다. 한국어든 일본어든 대체로 ‘와’로 시작해서 ‘멋있다(스바라시, 스고이)’는 반응이 대부분이었고 아주 드물게 ‘이게 다야?’라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나처럼 한참을 있다 가는 사람들, 와서 사진만 찍고 내려가는 사람들, 혼자 삼각대로 사진 찍는 사람, 셀카봉으로 가족사진 찍는 사람들 등등 각자의 방식으로 특별한 풍광을 즐기다가 갔다.
내려가기로 한 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목이 아파져서였다. 유황 가스를 오래 마시는 게 좋을 리 없다는 생각을 왜 못 한 건지 어느 시점에 목이 아프다는 느낌이 왔고, 갈 때가 되었다고 생각이 들어 마을 입구로 내려왔다. 삿포로에서 먹은 스프카레가 너무나도 인상적이어서 마을 입구에 있는 푸딩 가게 겸 스프카레 식당을 갔는데 삿포로에서 먹은 스프카레의 맛을 완전히 덮어버릴 정도로 충격적으로 맛이 없어서 매우 실망스러웠다. 누군가가 구글 리뷰에 ‘노보리베쓰는 음식점 무덤인데 이곳은 다르다’라며 극찬을 써 놓은 것을 보고 간 것이었는데 입맛이 다른 건지, 내가 낚인 건지 어쨌거나 맛은 없었고, 남겨서 밤에 배라도 고프게 되면 주변 가게도 없고 난감할 것 같아 꾸역꾸역 최대한 많이 먹기는 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역으로 내려가려고 버스정류장에 가니 다음 버스까지 한 시간이나 남았었다. 비까지 쏟아지기 시작해 하는 수 없이 작은 버스터미널 대합실에 서 너 명의 사람들과 앉아 아무 말을 하지 않고 시간을 보냈다. 버스 때가 가까워지면서 사람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었고, 컴컴한 저녁의 버스를 타고 다시 역 근처의 호스텔로 돌아왔다.
씻고 나서 벙커 같은 침대에 커튼을 치고 앉아 어렵지 않은 결심을 했다. 삿포로에서의 마지막 날은 반드시 호텔에서 머물기로. 삿포로에서 2박을 하고 귀국을 하는 일정이었는데 2박 모두 호스텔 예약이 되어 비용까지 다 지불한 상태였다(환불 불가). 마침 아고다에 특가로 삿포로 월-화요일 1박 4만 5천원 짜리 호텔이 떠서 미련 없이 예약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