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바 집에서 멀지 않은 오타루의 오르골당에 들렀다. 천장이 높은 성당 같은 건물에 온 갖가지 종류들의 오르골이 가득했고 주말답게 세계 각지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나는 언젠가부터 붐빔알레르기 같은 게 생겼는지 아무리 멋진 장소라도 지나치게 붐비면 감흥이 떨어져 집중하기가 어려워졌다. 오르골당은 아기자기하게 예뻤지만 이미 5일 차 여행에 지친 건지, 오르골에 흥미가 없는 건지 대충 둘러보고 나왔다. 유명한 오타루 운하까지 가는 좁은 골목길로 사람들이 정말로 많았다. 대체로 활기찬 분위기였다.
오타루 운하에도 역시 사람들이 많았다. 날씨가 워낙 좋아서 사람들이 붐벼도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을 만큼 멋진 광경이었다. 다리와 운하 주변으로 사진 찍는 사람들이 많았고, 체감상 삿포로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멋진 곳이었지만 역시 사람이 너무 많아 조금 정신이 없어져서 생각보다 빨리 삿포로로 돌아왔다.
삿포로역 코인 락커에 둔 캐리어를 꺼내 2박을 예약한 호스텔로 향했다. 2박을 예약했으나 1박만 하고 호텔로 갈 예정이어서 혹시 다른 손님을 받을 수 있게 체크인 시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새롭게 간 호스텔은 호텔처럼 건물 전체가 도미토리 호스텔이었는데, 그렇게 크게 운영하는 호스텔은 일본에서는 처음 봤다. 건물과 시설은 무척 깔끔했다.
“체크인을 하려고 하는데요.”
카운터에는 젊은 일본 남녀 네 명이 있었으나 영어를 할 줄 아는 여자 직원 한 명과만 이야기했다.
“여권을 주시겠어요?”
여권을 넘기고 났더니 개인 신상을 적으라며 종이를 주었다. 이름, 직업, 전화번호, 여권번호, 주소 등 적는 게 정말로 많았다. 나는 여권을 돌려받고 이름, 한국 전화번호, 여권번호만 적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요.”
여자 직원은 내가 쓴 종이를 훑더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과묵해 보이는 남자 직원을 쳐다보았다. 그는 단호한 표정으로 여자에게 일본어로 몇 마디를 했다.
“주소는 써 주셔야 합니다.”
나 또한 당황스러웠다. 진짜 주소를 쓸까, 가짜 주소를 쓸까, 쓰지 말까를 잠시 고민했다.
“일본 주소는 없고, 한국 주소를 말하는 걸까요? 저는 지금껏 여행하면서 단 한 번도 호텔이나 호스텔에서 주소를 요구받은 적이 없습니다.”
여권을 제출해 달라는 요구는 당연히 응하고, 보증금 용도로 카드를 요구하는 경우는 보았어도 주소를 달라는 요구는 처음 받아보았다. 일본의 다른 호텔에서도 체크인 시 적는 종이에 주소를 적는 부분이 가끔 있기는 해도 적지 않았고, 그 누구도 뭐라 한 적이 없었다.
여자 직원은 또다시 당황해하며 내가 한 말을 옆의 남자 직원에게 전달했다. 남자는 나나 그 여자 직원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언가를 일본어로 말했다.
“저...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필요하게 되어서 주소를 달라고 하는 겁니다.”
“제가 가짜 주소를 적을 수도 있잖아요.”
가운데 있던 다른 일본 여자 직원이 피식 웃었다. 나와 대화하던 여자 직원은 마침내 남자 직원에게 ‘받지 않아도 된다’는 컨펌을 받은 건지 그냥 넘어갔다. 1박만 하고 일찍 체크아웃을 하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안내받은 방으로 올라갔다.
방은 깔끔했다. 그곳도 전날 있었던 노보리베쓰의 도미토리와 마찬가지로 방에 있는 사람들이나 건물 내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대화는 거의 없었다. 많은 여행객들이 잠시 거쳐 가는 깨끗하고 쾌적한 시설이지만 나와는 맞지 않았다.
저녁을 먹으려고 도미토리를 나와 삿포로의 번화가인 스스키노로 걸어갔다. 낮 동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많은 관광객을 보았다면, 밤의 스스키노에서는 일본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어느 거리를 가든, 어느 골목을 가든 사람들이 많았다. 차마 혼밥을 할 수 있는 용기가 나지 않았다. 붐비는 스스키노를 떠돌면서 그때까지 얼마나 운 좋게 조용히 정성스레 만든 따뜻하고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는지 깨달았다. 비 오는 추운 날 아늑한 식당에서 먹었던 따뜻한 스프 카레, 벚꽃 흐드러지던 날 벚나무를 바라보며 먹었던 라멘 한 그릇, 조용한 소바 식당에서 먹은 갓 튀겨 뜨거웠던 새우튀김 두 개가 들어있던 따뜻한 소바, 어리바리한 여행객에게 정성을 다해 내어 준 차가운 소바 한 그릇. 문득 세상의 모든 운은 운인지 알고 있을 때만이 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저녁은 편의점에서 치킨 덮밥을 사서 호스텔 로비에서 먹었다. 일본 편의점 도시락은 그 맛으로 유명해서인지 무조건 중간 이상은 간다. 꽤 괜찮은 맛이었으나 그저 다음날은 무조건 아침부터 호텔로 향하리라는 다짐을 하며 그날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