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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선껌 Jun 08. 2023

10. 차가운 소바는 흰 면이 맛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윗 층 침대를 썼던 사람과 그 옆 윗 층 침대를 쓴 사람의 짐이 사라져 있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은 그렇게 있다가 사라졌다. 나 또한 있다가 없어진 사람처럼 조용히 도미토리를 빠져나왔다. 그곳은 그냥 나가는 게 체크아웃이었다.      


 어느새 홋카이도 JR패스 5일 사용 중 마지막 날이 되었다. 이날은 노보리베쓰를 떠나 삿포로로 돌아간 다음 캐리어를 역의 코인 락커에 두고 오타루에 다녀올 계획이었다. 오타루는 삿포로에서 열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작은 도시로 영화 러브레터에 나온 것으로 유명하다. 겨울 눈축제로 유명해서 꼭 겨울에 가보고 싶었는데 아쉬운 대로 봄에 방문하게 되었다.      


 일요일의 삿포로역은 꽤 붐볐다. 코인 락커가 상당히 많았음에도 내가 쓰려던 400엔짜리 가장 작은 락커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쓰고 있어서 화장실 앞의 락커를 겨우 찾아 짐을 보관했다. 오타루가 가까워서인지 하루에 가는 열차가 몇 십 분에 한 대씩으로 자주 있었는데, 지정석을 끊으려다가 가까운 거리를 굳이 표를 끊고 말고 하는 게 귀찮아서 전광판에 뜬 스케줄을 보고 플랫폼으로 가서 오타루행 기차 자유석에 앉았다. 

     

 오타루에 거의 도착했을 때 ‘미나미(남쪽)오타루’라는 역에 정차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지도로 검색해 보니 오타루의 유명 관광지들과 크게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서 그냥 내렸다. 붐비는 오타루 역에서 가는 것 보다, 작은 역에서 가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역에서 나오니 오른쪽으로 아주 큰 벚나무가 있었는데 벚꽃이 사방으로 예쁘게 떨어지고 있었다. 네 살 또는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포즈를 잡고 있고 엄마가 이리 저리로 사진을 찍었다. 나도 그 벚나무의 사진을 하나 찍고 싶었지만 그 둘이 있는 장면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떨어져 광경을 조금 지켜보다가 자리를 떴다.      

사진의 벚나무 왼쪽으로 훨씬 큰 벚나무가 있었다. 벚꽃잎이 흩날리며 그럴싸한 봄의 분위기를 냈다.

 점심시간이 되어 배가 고파졌다. 이번 여행에서는 배가 고플 때 있는 장소에서 가깝고 구글 별점이 좋은 식당을 그때그때 찾는 편이었고, 미나미오타루역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바집의 평이 좋아서 그곳으로 향했다. 이날은 종일 비가 오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전날 밤에 비가 온 것으로 끝나고 내내 날이 맑았다. 맑은 햇살을 받으며 오타루의 골목 골목을 걷는 분위기가 좋았다.      

오타루의 명소들로부터 조금 떨어져 있을 뿐인데 골목길은 평화롭고 한적했다.

 찾아간 식당은 내가 하코다테에서 찾아간 소바집과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다. 하코다테의 소바집은 테이블 서 너 개의 소박한 식당이라면 이곳은 테이블이 10개 정도는 되어 보였고, 분위기가 고급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았다. 내가 들어가니 ‘이랏샤이마세’라며 환영하는 인사와 함께 테이블로 안내했다. 메뉴를 주고 돌아가려는 직원을 붙잡고 내가 미리 검색한 사진을 보여주었다.     

 

 “아, 사진이 있습니까?”


 이름은 읽을 수 없지만 한자로 ‘차가울 냉’ 자는 읽을 수 있었다. 날이 맑다 못해 조금은 덥기도 해서 시원한 소바가 먹고 싶었다. 영어를 조금 할 줄 아는 직원에게 그 메뉴를 어떻게 읽느냐고 물어서 대답해 주기는 했으나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거의 모든 식당이 친절했지만) 내가 간 식당 중에 가장 상냥하고 친절했던 이 직원은 내게 어떤 면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면의 옵션이 있는 줄 몰랐던 나는 약간 당황했다. 

 “어... 아무거나... 주세요.”

 라고 말하고 나서는 다시 말을 덧붙였다.

 “사진에 있는 것과 같은 걸로 주세요.”

 직원은 웃으며 메뉴를 다시 받았다. 

 “차가운 소바는 흰 면이 맛있습니다.”

 사진에 있는 면이 흰 면이었기 때문에 옳은 선택이었다.      


 얼마 후 냉소바가 나왔고 그 위로 오이, 무순, 김, 맛살 등이 올려 있고 날계란 노른자가 가운데에 얹어있었다. 간장소스는 따로 그릇에 담아 나왔는데 이걸 찍어 먹는 건지 뿌려 먹는 건지 몰라 두리번대다가 지나가는 다른 직원에게 소스를 그릇 위에 뿌리는 시늉을 하며 ‘이게 맞나요?’라는 무언의 질문을 했다. 안경 쓴 여직원은 나와 같은 동작을 하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면과 간장소스, 날계란을 젓가락으로 섞은 후 한 입을 먹었다. 흰 면은 갈색 면보다 단단한 편이었고, 얹어진 오이, 무순 같이 아삭한 채소들과 잘 어울리는 식감이었다. 덥고 맑은 날씨에 매우 적절한 메뉴였으며 진심으로 맛있었기 때문에 역시 그릇 바닥이 보이도록 다 비우고, 셀프서비스로 제공된 주스, 커피도 완전히 다 마셨다. 면을 다 먹었을 때 직원이 작은 사기 컵에 걸쭉한 숭늉 같은 것을 디저트로 주었는데 그 또한 다 마셨다.      

 

1100엔이 조금 넘는 식사비를 내고 기분 좋게 가게를 나와 오타루의 유명지들이 몰려있는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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